feat. 아일랜드 대기근 역사 이야기
남편은 조상을 따져보자면 아일랜드 절반에 프랑스 1/4, 독일 1/4 정도 될 거라고 했다. 벌써 미국에 온지 몇 세대가 지났기 때문인지, 대대로 카톨릭 이라는 것 외에는 아일랜드계라는 어떤 가풍이나 전통같은게 딱히 남아있지 않은 듯 했다. 아일랜드 전통음식이라든가 뭐 이런 것도 자라면서 먹었거나 한 것 같지도 않다. 굳이 막 갖다 붙이자면 그래서 남편이 감자(튀김)을 좋아하나 정도?
전통이라는게, 고리타분하지만 그래도 막상 사라지면 안타깝다. 내가 미국에서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아이를 낳으면, 한국 색깔과 음식은 영영 사라져 버리는 것일까? 나는 한 번도 내가 대단한 애국자라거나 전통의 방법들만을 열렬히 사랑한다고 여겨 본 적은 없지만, 막상 내 자녀는 나와 같은 것을 공유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 할 때 마다 조금 슬프다. 한국을 대단하게 사랑할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그 음식재료나 문화에 내적 친근감을 가지고 자랄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그 아이의 아이에게도 "이거 맛있어"하고 물려줘서, 어쩌다 한 번씩 "아, 부대찌개 먹고 싶다. 할머니가 많이 해줬었는데." 하고 생각난다면 너무나 기쁘겠다.
그래서 한 번씩 아일랜드 음식을 해 보고 싶었으나, 남편은 뭐 나만큼이나 아는 게 없었다. 그러다 본 것이 우리가 자주 보는 "Tasting History" 채널을 운영하는 유투버 맥스 밀러. 그는 판데믹 전에는 디즈니 마케팅인가 오퍼레이션인가 에서 일하다가, 판데믹 이후에 휴직이 되면서 그 동안에 유투브에 영상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는 넷플릭스의 '브리티시 베이킹쇼' (내가 정말 좋아하는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를 정말 좋아했고, 거기서 초반에 역사와 음식을 엮어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을 보고 직접 영상을 만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맥스 밀러는 보통 일주일 내내 고문서를 연구해서 주 1회 영상을 올리는데, 바빌로니아, 중세시대부터 근대 까지 메뉴를 하나 정해 직접 만들어 보면서 관련된 역사 이야기도 풀어낸다. 요리쇼+역사쇼 인 셈. 말도 굉장히 조리있게 잘 하고, 본인이 열정적인게 느껴져서 재미있다. 이런 비슷한 취향의 사람들이 많은지, 푸드 히스토리 채널은 꽤 유명해졌고, 최근에는 이 채널에서 다룬 요리법들로 요리책도 냈다. 우리 동네 근처 북페어에 책 홍보하러도 왔었어서 보러 갔었다.
인기가 굉장했다! 팬미팅 같은 느낌. 일단 들어가려는 줄이 길었고, 현장에서도 사람들의 호응이 대단했다. 저 사회자는 좀 별로였고 준비해 온 질문도 별로였다. 질문 시간에는 끝이 안 나서 시간 관계상 끊어야 했다. 사인 받는 줄은 너무 길어서 우리는 그냥 집에 왔지만, 책은 온라인으로 주문했다.
어쨌든, 맥스 밀러는 아마 세인트패트릭스데이 근처 즈음에, 자기도 아일랜드계 후손이라면서 아일랜드 옛날 요리를 하나 만들었다. 보다 보니 재료도 간단하고 구하기가 쉬워서 나도 만들어 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시다시피, 아일랜드는 1700년대 중반~1800대 중후반에 걸쳐 대기근이 일어나 인구의 25%가 줄었다. 인구 감소의 이유는 아사와 이민. 노동자의 주 식량공급원이 감자였는데, 그 감자에 유행병이 퍼지면서 식량 생산량이 어마어마하게 줄었던 것.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왜 식량을 한 종류만 재배해가지고 자기네가 일을 키웠다며 놀림을 해 왔지만, 사실 이들은 다른 작물도 많이 키웠었다. 다만 그 작물들은 영국 중앙정부에 납품할 고기의 사료로 쓰이느라 막상 아일랜드 사람들은 손도 대지 못했다. 마치 일제 식민지의 한국에서 쌀을 그렇게 많이 생산하고도 모두 일본으로 보내느라 막상 한국 농민들은 굶주렸던 것과 비슷한 상황으로 보인다. 구휼의 책임이 있었던 영국정부의 담당자는, 게으른 아일랜드인에게 신이 벌을 내린 것이라며 별다른 손을 쓰지않았다. 오히려 세계 전역에서 구호 식량을 더 많이 보내 왔다고. 결과적으로 남아서 굶어죽느니 떠난다는 이민자가 엄청나게 많았고, 그중에 많은 이들이 미국 땅에 자리잡았다. 아일랜드는 지금까지도 대기근 이전의 인구수를 극복하지 못했다고 하니, 얼마나 심각한 상황이었나 알 수 있다.
그래서 맥스 밀러가 만든 요리도 역시 감자를 중심으로 한 소박하지만 1900년 레시피의 따뜻한 스튜. 본인이 먹으면서 너무 맛있다고 막 으음~ 굉장히 좋아했다. 저번 글에서 감자와 양고기를 사고 싶었던 이유가 바로 이거였다.
재료는 간단하다.
감자
양고기
아이리쉬베이컨 혹은 캐네디안 베이컨 (이 베이컨은 우리가 아는 삼겹살로 만든 베이컨이 아니라 햄과 좀 더 비슷하다. 캐네디안 베이컨이 없어서 그냥 스모크드 햄스테이크를 샀다)
양파
물
소금과 후추
양파는 잘게 썰고, 나머지는 카레에 들어가는 것 같은 크기로 자른다. 나는 당근이 있어서 그냥 조금 넣었다. 양고기를 발라낸 뼈에도 살이 붙어있었는데 이걸 어쩌지 하다가 그냥 같이 넣고 끓였다. 뼈가 있으면 더 잘 우러나오겠지 뭐, 하고.
그 다음 아무 것도 없는 빈 냄비에, 감자(당근도) - 양고기+베이컨 믹스 - 양파 순으로 층층이 쌓고, 간간히 소금과 후추를 뿌려 준다. 냄비 꼭대기 까지 차면 물을 300ml 정도 부어주고, 센 불에 보글보글 끓이다가 중약불로 줄여 뚜껑을 닫고 한 시간 정도 끓여주면 끝. 나는 마늘 가루도 있어서 그냥 좀 뿌려줬다.
이게 좀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는게, 기름에 고기나 채소를 한 번 볶아서 색을 낸다음 물을 넣어 끓이는 게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미역국도, 카레도, 뭇국도, 치킨 누들스푸나 비프 부르귀뇽도 다 먼저 한 번 굽거나 볶는다. 나도 아, 양고기랑 감자를 기름에 한 번 볶을까 말까 심각히 고민하다가 그냥 레시피를 따르기로 했다.
재료가 저렇게 많은데 타지 않나? 해도 뚜껑을 덮어 끓이는 데다가 채소에서 물이 나와서 꽤 자작하게 된다. 맥스밀러는 국물 요리가 아니니 뒤집지도 말고 섞지도 말라며, 만약 물이 다 없어지면 타지 않을 정도로만 더하는 수준이라고 강조했다. 동영상에서는 좀 더 꾸덕했는데 나는 물을 너무 많이 넣은 것인가 모르겠는데 국물이 꽤 자작해졌다. 당근을 넣어서 언뜻 보면 카레가루 안넣은 카레? 같이 생겼다.
자, 맛은 어땠냐 하면, 제목처럼 국물에서 양고기를 넣은? 뭇국 맛이 났다. 국물이 딱 맑은데 약간 기름진 뭇국 생김새. 아니 무도 안들어갔는데 왜 뭇국 맛이 나는 지 모르겠다. 양파 때문인가? 어쨌든 양고기에서 나온 기름이 촉촉하게 배어들고, 당근은 달콤하게 으스러지고, 감자는 포슬꾸덕했다. 넣은 것도 별로 없는데 생각보다 깊은 국물맛. 오, 이거 괜찮았다. 다만 양고기 냄새를 안 좋아하시는 분은 안 맞을 수 있겠다.
웃긴건 아일랜드 음식이랬는데, 자꾸 머릿속에 파김치가 팡 하고 나타나서 사라지질 않았다. 결국 다음날에 남은 것을 데워 먹기 전에 한인마트에 달려가 파김치를 사오고 말았다.
내 직감은 맞았다. 양고기와 감자가 약간 느끼하고 목 메이려고 할 때 알싸하고 매콤한 파김치 한 입이 들어오면 개운하게 입안을 씻어주었다. 그래! 이거지! 그냥 스튜가 커피라면 파김치와 함께일 때 넌 티오피..
(어린 친구들도 이 광고를 알까..?) 파 뿌리부분이 매울 줄 알았는에 아삭아삭 해서 전반적으로 포슬+녹진한 스튜의 식감을 보완하며 완벽한 궁합이었다. 파김치에서 젓갈 맛이 좀 나서 남편이 못 먹을 까봐 조금 잘라서 줘 봤는데, 다행히 맛있다고 잘 먹었다. 사실 남편이 실제로 파김치를 먹어 본 건 이번이 처음인 거 같은데 본인은 먹어본 적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건 평소 "파김치는 꿀맛이다" 라는 나의 세뇌에 의한 왜곡된 기억인 듯 하다.
아일랜드 감자양고기스튜와 한국의 파김치는 아무 연관도 없지만, 너무너무너무 잘 어울린다. 포슬포슬 부드러운 느끼한 것과 알싸하고 사각사각한 것의 만남. "과연 남편과 나 같지 않은가" 하는 낯간지러운 발언을 해 본다. 서로 아무 연관도 없으면 어떠랴. 이렇게나 잘 어울리는 한 쌍인 걸. 내 아이에게 맛보여주고 싶은 우리의 퓨전이 하나 더 생겼다. 앞으로 자주 해 먹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