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초대의 굴레
우리는 홍콩으로 떠났다.
(이전 글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14시간이나 되는 비행이 끝나자 저녁 즈음에 홍콩에 도착했는데 습한 공긱가 얼굴을 때렸다. 한국행 보다 고작 몇 시간 길 뿐인데도 굉장히 피곤했다. 버스나 열차가 잘 되어있다고는 하나 귀찮아서 우버를 때려 탄 우리는 그 사촌에게 도착했다고 문자를 했다.
그는 어서 오라며 반갑다고 답장을 해 주더니, 홍콩과 샌프란시스코를 자주 오가는 자기를 믿으라며, 시차를 이기려면 절대 초저녁에 잠 자면 안된다고 깨 있으라고 했다. 우리가 알았다고 하려는 차에, 문자가 계속되다가 "아, 잠 자면 안되니까 그럼 차라리 택시타고 지금 우리집에 바로 와서 와인 한 잔 하면 어때? No Pressure! (부담 주는 건 아니고!)" 하고 갑자기 집으로 초대를 했다. 어,,어엌 그집엔 7개월 된 아기도 있는데.. 우리는 어찌어찌 우리끼리 호텔에서 쉬면서 깨 있겠다며 어야무야 거절을 했다. 그래 어차피 내일모레 보기로 했으니까.
다음 날, 남편은 일이 있고, 나 혼자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놀았다. 아침에는 제일 먼저 그 사촌이 추천해 준 곳 하나를 열자마자 갔다. 골목에 허름한데, 미슐랭 가이드 (별 아니고)를 매년 받고 있는 곳 같았는데, 꽤 저렴하고, 빠르고, 맛있었다. 추천해 준 것이 고마워, 음식 사진을 찍어 고맙다고 문자를 보냈다. (이 식당정보는 여기)
그는 "오! 거기 갔구나! 맛있고 맘에 든다니 다행이야!" 하며 문자를 연달아 보내기 시작했다. 내가 채 답장을 몇 번 할 새도 없는 사이에 문자가 한참 날아들더니,
"오늘 돌아다니다가 도움 필요하면 얘기해"
"언제든 전화해도 돼"
"내 사무실은 @@에 있는데, 여기로 점심 먹으러 와도 좋아!"
"아이 더 다 계획이 있을테니 부담주는 건 아니야"
"내 사무실은 너 있는데서 택시 타면 15분-20분이면 와"
"혹시 관심 있으면 말야. 여기 아래층에 캔토니즈 차슈가 엄청 맛있어"
나는 한참 시킨 음식을 먹다가 뿜으며 웃었다. 이런 급초대가? 남편도 없는데 나 혼자 뻘쭘하게??ㅋㅋㅋ
또 거절하면 두 번째 인데.. 어쩔까 하다가 "아, 오늘은 남편 없이 나 혼자 노는거라.. 나는 남편 사촌과 단 둘이 밥먹기는 좀 어색해서..ㅋㅋㅋㅋ"하고 보냈는데,
"아, 단 둘이 아냐"
"내 동료직원 (아마도 부하직원) 시스템 분석가 앤드류(가명)도 같이 올거야"
나는 밥을 먹다 거위고기가 목에 걸렸다. 어엉??? 아니 이사람은 또 누구야?
"홍콩사람이고"
"20대 후반이야"
"공짜점심을 좋아하지" (아마 자기가 사는 점심이니 부하직원이 좋아하며 올 것이라는 뜻인 듯)
"ㅋㅋ아이 부담갖지마. 나 먹는 거 엄청 좋아하는데, 너두 그런 것 같구 나도 아시아에서 오래 살아서 ㅋㅋ(이하생략)"
끄엉ㅋㅋㅋㅋ 아니 졸지에 한 번 만나 본 미국인 남편 사촌과 생판 모르는 그의 부하직원 20대 후반 홍콩인 시스템 분석가 앤드류까지 함께 밥을 먹게 생겼는데? 나는 아, 나 지금 11신데 네가 추천해 준 데서 밥을 먹고 있어서, 배불러서 못 먹을 것 같다고 필사적으로 기분나쁘지 않게 거절을 했고 (두 번째 초대 거절..), 그는 그럼 다음 날 보자고 문자를 했다.
남은 밥을 먹으면서 아무리 곱씹어봐도 너무 웃겼다. 이게 무슨 일이지?
마침내 함께 아점과 저녁을 먹기로 한 날. 약속한 음식점에 우리가 먼저 도착해 줄을 섰다. 그 사촌은 7개월짜리 아기와 택시를 타고 도착해서 합류했고 우리는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사촌 부인은 곧 오는 중이었다.
사촌은 아, 줄게 있다며 곱게 접힌 종이를 내밀었다. 잉? 뭐지 하고 봤더니, 다름아닌 저녁 홈 파티 메뉴였다.
에피타이저, 전채요리, 메인, 디저트. 마지막에는 와인메뉴 까지. 나는 아니, 메뉴까지 만들었어?ㅋㅋㅋㅋ 하고 웃고 있는데, 남편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엇? 이거?"
"아 역시 알아보는구만" 사촌은 기분 좋은 듯이 웃었고 둘이 뭐가 좋은지 함께 낄낄거렸다.
알고보니 와인이 꽤 유명한 것들이었단다 (저 와인 세 병 값만 150만원 쯤 된 듯). 남편은 좋은 와인에 신이 났고 사촌은 남편이 좋아하고 알아봐주자 같이 신이났다.
모두가 합류해서 같이 딤섬을 먹고나자, 우리에게 자기네 집에 저녁 먹으러 오기 전 까지 무엇을 할 것인지 물었다. 우리는 딱히 엄청난 계획은 없다고 했더니 그럼 이건 어때, 저건 어때 추천이 날아들기 시작하더니, 함께 여기 저기를 가는 건 어떤지 우리를 데리고 어디를 갈 눈치였다.
어차피 저녁에 너의 집으로 가기로 하지 않았냐, 하면서 우리는 또 (벌써 세 번째) 거절했고, 호텔로 돌아갔다. 아기에게 줄 선물 등을 포장하려고 커다란 몰 구경을 하다가 포장용품을 구매했다. 꽃을 사가려다가, 혹시 알레르기가 있으면 어쩌냐, 꽃 보다는 레고 꽃이 좋지 않겠는가 하고 고민했는데, 과연 그 사촌이 레고를 좋아하는지, 안 좋아하면 다 완성해서 갖다줘야 하지 않겠냐 하고 남편과 언쟁하다가 시간이 너무 지나 결국 레고 오키드는 구매하지 않았다.
저녁에 사촌의 집에 도착했다. 아파트였는데 한 유닛이 2층으로 되어있는 구조였고, 활짝 열린 오션뷰가 천장이 높은 커다란 창문 한가득 쏟아져들어왔다. 사촌과 사촌의 부인, 아기, 그리고 헬퍼(가사도우미분. 홍콩에는 꽤 흔하다고 함)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사촌은 활짝 웃으며 에피타이저와 문제의 그 비싼 와인을 권했고, 남편은 아주 좋아하며 사진도 찍고 즐겁게 마셨다. 깔끔한 스파클링에 은은한 사과향이 도는, 아주 맛있는 와인이었다. 우리는 저녁이 준비되는 동안 패티오에 앉아 멋진 바다, 섬, 구름을 보며 에피타이저를 먹었다. 샌프란시스코는 저녁에 추워서 보통 밖에 잘 못 앉아있는데. 거기에서는 저녁에 조금 습해도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기분좋게 얼굴을 어루만졌다.
우리도 가져간 선물을 건넸다. 아기용 책과 곧 할로윈이므로 귀여운 공룡 옷. 부인에게 한국 화장품도 건넸는데 한국 화장품 유명하다며 좋아했다. 받은 기념으로 사진 까지 찍으며 아주 좋아해주었다. 원래 레고 난초도 사오려고 하다가 좋아하는지 몰라서 말았다, 했더니 사촌이 아니 자기 레고 엄청좋아하는데! 하며 모으고 있는 레고세트 몇 개를 보여주었다. 레고 난초 시리즈인 다육이세트도 하나 갖고 있었다. 에이 사올걸 하고 아쉬웠다.
곧 저녁이 준비되었다. 비트로 만든 샐러드를 먹고 있는 동안 사촌은 분주하게 수비드로 조리하고 있던 립아이 스테이크를 겉면을 구워냈다.
비주얼이 어찌나 끝내주는지. 짭짤하고 쫄깃한 스테이크에 레드와인, 입에서 살살 녹는 부드러운 광어요리에 화이트와인을 먹었다.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며 음식을 먹고, 와인을 마셨다. 디저트로는 일본에 갔다가 사왔다는 치즈케이크를 먹었다. 이쪽도 백인-아시안 커플이라, 우리와 통하는 면이나 고민하는 면이 많았다. 첫 아기를 낳은 초보 부모여서 이러저러한 아이 교육 내용 고민이나, 어느 나라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충까지. 그들은 그동안 놀러온 사람들이 없었어서, 너무 신났었다고, 와줘서 너무 좋다고 했고, 우리는 초대해 줘서 정말 고맙다고 했다.
기분좋게 저녁을 먹고 자정이 가까워져서야 우리는 홍콩의 낡은 빨간택시를 타고 돌아왔다. 얕은 술기운에, 아직 남은 배부른 배를 어루만지며, 미국 남편과, 미국남편 사촌과, 타이완인 남편 사촌 부인과, 그들의 아이와, 필리핀에서 온 헬퍼와, 한국 사람인 내가 홍콩에서 그들의 집에 초대받아 저녁 먹고 이야기 하고 돌아오는 기분이 묘하면서도 즐거웠다. 인생이란 참 알 수 없는 것. 다양한 곳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 또 그 곳과는 아무 상관없는 제 3의 곳에서, 무슨 인연으로 이렇게 모여 친척으로 어울릴 수 있다는 것이 곱씹어 생각할수록 신기하지 않은가. 자꾸 거절해야해서 미안했지만, 초인싸 특유의 발랄함으로 끝없이 신경써 주고 정성을 다해 저녁까지 대접해 준 그들이 고마웠다.
나는 홍콩에 잠깐 있다가 떠났고 남편은 남아서 일을 하는 사이, 사촌과 또 만나서 저녁을 먹었단다. 이번에는 레고 오키드를 사다 주었고 그는 엄청 좋아하며 집에 가서 사진까지 찍어 보내주었다. 사촌은 식당에도 자기 와인을 들고 와서 코키지 피를 내고 함께 마셨고 아주 재밌게 저녁을 보냈다고 한다. 둘이 서로 계산하겠다고 싸우다가 계산하는 기계에 카드를 둘다 디밀었는데, 어느 카드가 찍혔는지 당시에는 몰랐다가 나중에 보니 사촌 카드가 계산에 승리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