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함께 쓰는 이야기 #3
노인복지관 3층 강의실. 겨울 햇살이 창가에 걸터앉은 화분을 비췄다. 'ChatGPT와 함께 자서전 쓰는 노하우' 첫 수업날이었다. 열두 명의 수강생이 기대에 찬 얼굴로 노트북 앞에 앉아있었다. "오늘은 먼저 각자 써오신 글을 나눠볼까요?" 순간, 가슴이 조였다. 목이 막히고 손바닥에 땀이 배어 나왔다. 늘 이랬다. 뭔가 잘못될 것 같은 예감이 들면, 몸이 먼저 반응했다.
"선생님, 시작해요."
수강생들의 기대에 찬 눈빛이 나를 향했다. 책상 위에는 각자 써온 자서전 초고가 놓여있었다. 그들의 인생이 고스란히 담긴 종이 뭉치들.
첫 번째로 손을 든 건 평생 시장에서 생선을 팔았다는 김미영 할머니였다. 손주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라며 조심스레 노트를 펼쳤다. 글씨는 삐뚤삐뚤했지만, 시장 생활 40년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이런 이야기가 자서전이 돼요?"
뒤에 앉는 박현희 할머니의 날카로운 질문에 강의실이 얼어붙었다. 앞줄의 수강생들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장사 이야기잖아요. ChatGPT도 이것보다 백배는 잘 쓸 텐데. AI 수업 아니었나요?"
김미영 할머니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다른 수강생들도 불안한 눈빛으로 자신들이 써온 글을 슬그머니 감췄다. 평생 농사짓다 처음 글을 쓴다던 박진효 할아버지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선생님, 우리가 뭘 잘못한 거예요?"
'괜찮아. 이번엔 다르게...'
심호흡을 하려는데 실무자가 들어왔다.
"와이파이가 고장 났어요. 오늘은 AI를 쓸 수 없을 것 같은데..."
가슴 한구석이 무너져 내렸다. 익숙한 공포가 엄습했다. 대학 시절, 발표만 하면 도망치던 그때처럼. 직장에서 프로젝트가 막힐 때마다 사표를 품에 넣고 다니던 것처럼.
'화장실'
도망칠 구실을 찾는 내 머릿속 GPS가 가장 가까운 탈출구를 찾아냈다.
"잠시만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화장실로 갔다. 수강생들의 따가운 시선이 뒤통수를 따라왔다.
화장실 칸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이래서 늘 첫 수업 때는 화장실 위치부터 확인해 두는 거였다. 달아날 곳을 미리 알아두는 게 내 오랜 습관이었으니까. 휴대폰을 꺼냈다. 실무자에게 보낼 문자를 썼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몸이 안 좋아서...'
'급한 일이 생겨서...'
'더 이상 수업을 못...'
익숙한 변명들. 스무 살 때부터 써오던 도망자의 대본 같은 것들. 문밖에서 수강생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우리가 쓴 글이 그렇게 시시한가..."
"AI도 없는데 이제 어쩌지..."
"그냥 집에 가는 게 나을까..."
화장실 거울을 보니 그 속에 내 모습이 떠올랐다. 스무 살, 서른 살, 마흔 살... 매번 이렇게 도망쳐왔다. 도망칠 때마다 뒤돌아보지 않으려 했지만, 결국 더 큰 후회가 뒤따랐다.
'이제 그만...'
입술을 깨물었다.
'더는 도망치지 말자. 이제는...'
숨이 막혔다. 입술을 더 세게 깨물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그때였다. 까만 허공이 입을 벌리고 나를 삼켰다...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복도에 메아리쳤다.
"이게 뭐야? 이런 것도 프로그래밍이라고... 버그 하나를 제대로 못 잡네."
검은 하이힐이 대리석 바닥을 두드리며 다가왔다. 화려한 보석으로 장식된 왕관을 쓴 여인. 그녀는 내 앞에 멈춰 서서 거울을 꺼냈다. 거울 속에는 98년, 소프트웨어개발과 새내기 시절의 내가 있었다.
"저기 봐. 네가 그랬잖아?"
거울 속, 스무 살의 나는 컴퓨터실 구석에 앉아 있었다. 교수님이 Visual Basic을 가르치며 30분째, 버그를 못 잡고 있었다.
"대학 교수가 이것도 모르나? 이런 학교에 왜 왔지..."
여황제는 입술 한쪽을 비틀어 올리며 웃었다. "네 모습이 마음에 들어? 정말 잘났었나 보네."
거울이 다른 장면을 비추었다. 동기들이 프로그래밍 실습에 애를 먹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도와주기는커녕 무시하듯 자리를 피했다. '나랑은 수준이 다르네.'
하이힐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넌 특별했지. 모두가 너보다 한참 못났으니까."
목이 메었다.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여황제는 계속해서 거울을 들이밀었다.
"근데 봐. 이건 뭐야?"
거울 속에서 시간이 흘렀다. 동아리방. 내가 그토록 무시하던 사람들은 서로를 도우며 성장했다. 그들은 점점 가까워졌고, 웃음소리가 가득한 자리를 만들어갔다. 하지만 나는... 구석에 홀로 앉아 있었다.
"고립이 무섭지 않아?"
여황제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거울 속에서 나는 점점 작아졌다. 방 안에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커튼을 치고, 전화를 끄고, 세상과 단절했다.
"넌 그들보다 특별하잖아? 그런데 왜 이렇게 됐을까?"
귓가에 메아리치던 말들이 되돌아왔다. 내가 던졌던 모든 멸시와 조롱이, 이제는 나를 향한 비난이 되어 울렸다.
거울 속 방은 점점 좁아졌다. 숨이 막혔다. 벽에는 내가 했던 말들이 끝없이 새겨졌다.
'이런 것도 모르나?'
'이런 학교에 왜 왔지?'
'나랑은 수준이 다르네.'
여황제는 거울을 내 눈앞에 바짝 들이밀었다. "봐. 네가 만든 거야. 이 벽들, 이 고립, 이 두려움... 전부 다."
나는 움츠러들었다. 거울 속에서 스무 살의 내가 울고 있었다. 그때의 오만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이제 어쩌지? 넌 영원히 이 방에..."
숨이 막혔다. 가슴을 두드려도 소용없었다. 가슴이 두쪽이 나는 것처럼 아팠다. 그때, 중력이 몸을 아래로 잡아당기는가 싶더니, 곧 위로 끌어올렸다. 까만 허공이 입을 벌리고 나를 삼켰다. 끝없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무섭지 않았다. 마치 양수 속 태아처럼 평화로웠다. 수많은 별들이 내 주위를 맴돌았다. 어떤 별은 루비처럼 붉었고, 어떤 별은 사파이어처럼 푸르렀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 말 듯, 별들은 반딧불처럼 춤추며 빛났다.
B612에 내려선 순간, 모든 감각이 달라졌다. 발걸음은 구름 위를 걷는 듯 가벼웠고, 공기는 박하사탕을 녹여 만든 듯 달콤하고 화했다. 하늘은 검은 벨벳을 펼쳐놓은 듯했고, 별들은 그 위에 박힌 보석 같았다. 시간조차 다르게 흘렀다. 1분이 1년 같기도 하고, 1년이 1분 같기도 했다.
"안녕?"
돌아보니 금발의 소년이 서 있었다. 목에 긴 목도리를 두른 채. 어린 왕자였다. 그의 발자국 하나하나에서 별이 피어났다가 사라졌다.
"어서 와. 널 기다리고 있었어."
"날?"
"응. 그리고 저기 숨어있는 그 아이도."
어린 왕자가 가리킨 곳에는 한 소녀가 웅크리고 있었다. 까만 단발머리에 깡마른 몸. 그 모습이 너무나 낯설고도 익숙했다. 스무 살의 나였다.
"왜 울고 있어?" 어린 왕자가 소녀에게 다가가 다정히 물었다.
"나는...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을 무시했던 제가 부끄러워요. 이제는 제가 그들처럼 됐나 봐요. 아니, 더 못한 것 같아요..."
그녀의 눈물은 땅에 떨어지자마자 얼음처럼 굳어졌다. 어린 왕자는 작은 삽을 꺼냈다. 달빛으로 만든 듯한 삽으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파낸 흙은 은가루처럼 반짝였다.
"여기가 너의 정원이 될 거야."
"정원?"
"응. 별들의 정원."
그는 소녀의 얼어붙은 눈물을 하나씩 주워 작은 구덩이에 심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그 눈물은 땅에 닿자마자 뿌리를 내리고 자라나기 시작했다. 줄기는 수정처럼 투명했고, 잎은 오팔처럼 무지갯빛이었다. 꽃이 피어날 때마다 새로운 별이 탄생했다.
"봐. 너의 아픔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어린 왕자는 소녀의 손을 잡고 언덕 위로 데려갔다. 그곳에서는 온 우주가 한눈에 들어왔다.
"저기 보이는 별들을 봐."
"네.."
"같은 별이라도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른 색을 내지. 저기 붉은 별은 지구에서 보면 파란빛이야. 우리가 서 있는 위치가 달라지면, 모든 것이 달라 보여."
어린 왕자는 허리를 굽혀 작은 별 하나를 주웠다. 그리고는 울고 있는 소녀의 손에 쥐어줬다.
"너의 실수와 후회도 이 별과 같아. 지금은 아파서 견딜 수 없는 것 같지만, 다른 곳에서 보면 누군가에게 빛이 될 수 있어. 네가 겪은 그 모든 순간이, 지금 다른 이들의 아픔을 이해하는 힘이 될 수 있어."
소녀의 눈물이 땅에 떨어질 때마다, 그 자리에서 작은 별이 피어났다. 처음에는 희미했지만, 점점 밝아져 마침내 찬란한 빛을 내기 시작했다.
"봐, 너의 눈물조차 별이 되고 있어. 이제 그만 자신을 미워하지 않아도 돼."
어린 왕자의 말에 소녀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꽃잎 하나가 바람에 날려 내 뺨에 닿았다. 그 순간 나는 보았다. 스무 살의 내가 겪었던 모든 순간들을. 교수님을 오만하게 대했던 순간, 동기들을 얕잡아 보았던 순간,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부메랑이 되어 나를 고립시켰던 순간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번에는 그 기억들이 아프지 않았다.
밤하늘 전체가 오로라처럼 물들기 시작했다. 별들이 만드는 빛의 물결 속에서, 나는 깨달았다. 그때의 실수들과 상처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경험들이 있었기에, 지금 내가 다른 이들의 어려움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어린 왕자는 마지막 눈물을 심었다. 그러자 정원 전체가 한꺼번에 빛나기 시작했다. 그 빛 속에서 소녀가 일어섰다. 더 이상 울고 있지 않았다.
"이제 알겠어. 제 별들도 누군가에게는 길잡이가 될 수 있다는 걸."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이야."
어린 왕자가 말했다.
"걱정 마. 넌 혼자가 아니야. 이 별들처럼, 너의 모든 순간이 누군가에게 빛이 될 거야."
눈을 떴을 때, 강의실의 형광등이 눈부셨다. 와이파이는 여전히 터지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이 평온했다. 수강생들을 바라보니, 그들의 얼굴에서 각자의 별을 보는 것 같았다.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빛을 가지고 있었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한 수강생이 물었다.
"네, 괜찮아요. 오히려 아주 좋은 생각이 났어요. 오늘은 AI 없이, 우리만의 이야기를 나눠볼까요?"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인생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실수와 후회, 성공과 실패가 뒤섞인 이야기들. 그 모든 것이 우리를 빛나게 만드는 별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도시의 불빛 때문에 별은 보이지 않았지만, 괜찮았다. 현관문을 열자 치킨 냄새가 풍겨왔다. 엄마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오늘 힘들었지? 오늘은 네가 좋아하는 레드순살 시켰어."
엄마가 시켜준 치킨을 먹으며 눈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내 안에 있는 별들 정원. 다음 주에는 수강생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려줄까. 그들의 삶에서 어떤 별들을 끄집어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