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우리 집을 공산주의라 말하고 나를 독재자라 칭한다. 내 요구를 듣지 않으면 집이 시끄러워지니 평화주의자 남편은 저런 농담을 던지며 웬만하면 다 따라준다. 하지만 규칙적인 생활 습관의 나와 자유로운 생활 습관의 남편이 부딪치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아침 식사 문제였다.
생긴 거와 다른 우리 부부, 소위 말해 놀게 생긴 나는 방학 때도 알람을 맞춰 놓는 인간이고 참 범생처럼 생긴 남편은 힙합을 좋아하는 자유 영혼이다. 본인 꿈은 한량이지만 처자식에 대한 책임감으로 돈 버는 기계로 사는 불쌍한 사람이라고도 한다.
남편은 날 보며 재미없게 산다고 종종 말한다. 밥까지도 세끼 칼 같이 챙겨 먹는다며 규칙에서 좀 벗어나라고도 한다. 먹는 거야 규칙 때문이 아닌 진짜 배가 고파서지만 남편 말이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먹는 걸 워낙 좋아하기도 하고 규칙적인 식사로 가족들의 건강을 챙겨야 한다는 강박도 없지는 않다.
글을 쓰다 보니 생각나는데, 아이들이 어릴 때 내 여동생이 나에게 '이유식 집착녀'라는 별명을 지어주었었다. 친정에서 모일 때면 동생은 편안하게 와서 김치 쓱쓱 씻어 애들 밥을 먹였다. 돌쟁이 어미가 저런다고 나는 타박을 주었지만 오히려 동생은 나를 타박했다. 집에서나 잘 챙겨 먹일 것이지 친정까지 와서 바리바리 이유식을 만들어 싸 온다며...
이유야 어찌 됐건 이유식 집착녀는 세끼 집착녀로 잘 살고 있다. 나도 늦잠 자고 싶고 차려준 밥 먹고 싶지만 오직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밥을 한다며 생색도 자주 낸다. 밥 먹으라고 부를 때 식구들이 제깍 나오지 않는 것만큼 화나는 일이 없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밥은 내가 안 하는 밥인데 저 가족들은 그 감사함을 전혀 모른다 싶다. 처녀 때는 학교 급식을 아무 생각 없이 먹었으나 주방이 내 차지가 되면서부터는 쌀 한 톨도 감사함으로 먹는다. 먹기 전과 먹고 나서 영양사, 조리사 선생님께 고개 숙여 인사드리는 건 일상이 되었다. 밥 하는 노고와 정성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겨울방학부터는 사춘기 딸들까지 미적거리며 소리를 질러야 나오기 일쑤였다. 어떤 날은 다섯 명의 아침 식사 시간이 다 다르기도 하니 내가 밥 차리는 기계로 전락한 것 같다.
엄마는 밥 하는 사람이 아니다.
청소하는 사람도 아니다.
물론 집안일에 취미는 전혀 없다.
엄마도 누가 차려주는 밥 먹고 싶고 커피 마시며 책이나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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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오늘 엄마 잘못 건드렸네.'란 가족들의 마음이 역력히 느껴진다. 넷 모두 고개를 박고 할당량을 꾸역꾸역 먹기 시작한다. 즐거워야 할 식사 시간이 살벌한 서바이벌장으로 변한 것 같다.
한참 뒤 남편이 진지하게 얘기한다.
아침만이라도 자유롭게 하면 안 되겠냐고...
하긴 연애할 때 남편의 가장 신기한 점은 허기를 못 느끼는 남자란 것이었다. '배가 안 고파서 삼일째 안 먹고 있다'는 그의 얘기는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는 충격적인 말이다.
친구들이 몸무게를 좀 더 빼서 군면제를 받으란 농담도 했단다. 진짜 그래 볼까 싶어 며칠 굶고 입대를 했다가 힘들어 죽을 뻔했다는 얘기도 들었다. 그런 그를 이렇게 변화시킨 건 다 내 덕이지만 이제는 비만을 걱정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참 열심히 먹이긴 했나 보다.
아침마다 밥 먹으라고 부르다가 결국 소리를 지르게 되니 나도 많은 생각이 들었다. 공산주의 독재가 참 잘 통했는데 이제 중학생인 딸들이 더 이상 독재를 눈감지 않는다. 고생하고 기분 상하는 식사 시간을 계속하느니 대책이 필요했고 다소 격한 감정으로 선언문을 작성했다.
저녁 식사 시간에 가족들의 사인을 받아 냈고 나는 매우 진지하다며 으름장도 놓았다. 화를 내지 않고
선언문을 통해 평화적으로 문제를 타결했다며 자찬도 했다.
항상 식탁 앞 벽에 붙어 있었기에 붙어 있는지도 잊는 날들이 계속됐다.
오늘 오랜만에 대청소를 하며 집안 구석구석을 살피다가 우연히 눈에 들어온 아내, 엄마의 선언
아이공 나 참 못됐다. 굳이 저렇게까지...
나도 붙여 놓은 거 잊었으니 가족들도 그렇겠지 싶어 주변 한 번 쓱 둘러보곤 뗐다. 협박과 강압으로 되는 일은 없는 걸 알면서도 실천은 참 어렵다. 저걸 붙여 놔도 규칙대로 지키지도 못했으면서 합리적인 척은 혼자 다 하는 내가 거시기하다.
저녁 식사 후 남편이 슬쩍 다가오더니 묻는다.
"대단한 선언문 떼셨네?"
"계속 봤나 봐?" "봤지, 아침 안 먹으면 하루 종일 건들지 않는다니 좀 좋던데 아쉽다잉."
"뭐?"
오늘도 한 수 아래였네. 독재자, 일인자로 우쭈쭈 해주고 내 머리 꼭대기에서 노는 남편.
머리 좀 그만 굴리고 넓은 마음으로 가족들을 품어 보자 싶다. 물론 내일 아침에도 소리를 꽥 지르며
밥 먹으라고 부르겠지만.
식탁에 세팅도 하지 않은 채 나는 가족들을 부를 테고 그들은 또 속았다고 불평을 하겠지. 다람쥐 쳇바퀴 돌아가는 평범한 일상에 픽 웃음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