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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다 Nov 24. 2019

왜 이제야 왔니

어디에 있었던거니

 

 2014 10 17.


 남편과 내가 처음 만난 날이다. 이종사촌언니의 오랜 친구였던 그는 언니에게 종종, 예쁘장한 사촌동생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그날 저녁 그는, 무심코 언니와 연락을 하던 중 "나 지금 사촌동생이랑 동네 카페에 있어."라는 정보를 입수, 반사적으로 "나 지금 갈게!"란 톡을 날리고 부랴부랴 옷을 챙겨 입었단다.


"이 새끼가? 네가 여길 왜 와."라는 언니의 톡 앞에는 1이 사라지지 않고 한참이나 떠 있었다.


 그렇게 남편과 만났다. 먼지도 미끄러질 것 같은 광택을 뽐내는 새빨간 스포츠카에서 웬 어울리지 않는 남자가 내렸다. 머리가 큰 건지 어깨가 좁은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첫눈에 반할 만큼 좋은 비율은 아니었다. 4년 간 함께 살며 증명된 사실인데, 머리도 크고 어깨도 좁다. (남편, 미안)


 남편은 그때의 만남을 회상할 때마다 천진난만하게 웃는다. 자유분방하게 꿈틀대는 남편의 안면근육에는 '그때 만나지 않았으면 참 좋았을 텐데' 하는 후회가 짙게 깔려 있다.


남편 : 여봉봉이 그때 얼마나 귀여웠는지 몰라요.
나 : 또 그 스쿼트 얘기하려는 건 아니죠?
남편 : 5년 전인데, 어제 본 장면처럼 선명해요.


 그 당시 나는 29년 동안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한 다이어트의 명맥을 가까스로 잇는 중이었고, 별 의미 없지만 이번 종목은 스쿼트였다. 카페에서 나서는 길에 계단 서너 칸을 내려가며 "스쿼트를 3일 했더니, 걸음걸이가 이모양이에요." 하고, 관절의 사용법을 제대로 익히지 못한 AI 로봇처럼 사지를 뻗어 뻣뻣하게 움직였다. 절뚝절뚝 계단을 내려왔다.


 그 모습에 반했단다.


 그는 잠실에서 경기도 의왕까지 선뜻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초면인 언니 친구에게 폐를 끼칠 수 없어 거듭 거절하고 있는 나를, 언니는 힘껏 차에 밀어 넣었다. "타고 가! 이 시간에 집까지 지하철로 어느 세월에 가려고." 나는 광나는 빨간 스포츠카에 드러눕듯 올라탔다.


  '다시는 타고 싶지 않은 승차감이다.'라고 생각하고 있을 즈음, 적막을 깨고 그 사람이 운을 뗐다.


남 : 앞으로 뭐 하고 싶어요?
나 : 하고 있는 일 계속하면서, 틈틈이 공무원 준비하려고요. 오늘 인강 결제도 새로 했어요.
남 : 그건 OO 씨가 하고 싶은 일이에요?
나 : 하고 싶은 일이라기보단, 안정적이니까요.
남 : 그렇구나, 나는  OO 씨가 정말 하고 싶을 일을 했으면 좋겠어요.


 나에게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말해준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다. 이런 사람이 존재했단 말인가! 심지어 부모님에게조차 들어본 기억이 없는 대사다.


똥차 가고 벤츠 온다.


 이별한 사람을 위로할 때 쓰는 대표적인 문장이다. 지금까지의 내 연애는 찬란하리만큼 똥망진창이었다. 똥차 가고 똥차 오고, 열심히 세차하고 왁싱해 놓으면 제 갈 길 가버리더니만, 그새 또 다른 똥차가 왔다. 이쯤 되니 비로소 깨달았다.


아! 내가 폐차장이구나?!


 사랑이란 자원봉사 아니었나! 간 쓸개 다 빼주고 차여야 제 맛 아닌가? 오랜 친구들은 "넌 도대체 어디가 모자라서, 남들은 굳이 찾아 만나기도 힘든 남자들만 그렇게 발굴해 만나는 거냐."라고 이야기하곤 했는데, 그럴 때면 나는 "내 낮은 자존감이 나를 그들이 있는 곳으로 데려다주는 거 같아." 대답했다.


 겨울왕국 2에서 엘사가 북쪽 땅에 이끌렸듯, 나도 그저 이끌려 갔을 뿐. 엘사는 마법의 숲 여왕이 되었으나 나는 폐차장이 되었다는 것이 문제지만 말이다.


 그는 폐차장 개업을 앞둔 나에게 "그런 밑지는 사업일랑 접어두고 나와 동업하는 게 어때?" 제안한 셈이다. 내가 그와 결혼해야겠다 마음먹은 이유 세 가지 중 하나였다.


 그 후에도 많은 대화를 나눴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 사람, 목소리가 참 좋구나.'라고 느꼈던 감각만이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실제로 부부싸움 중 남편에게 등지고 그의 목소리만 듣고 있자면, 개풀 뜯어먹는 소리도 세레나데로 들린다.


 집 앞에 다다르자 그는 말했다.


친구 사촌동생이라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실례가 안 된다면 전화번호 알려줄 수 있어요?




 실례는 무슨 실례?

 사례를 해도 모자랄 판이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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