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 연재 <딸의 엄마로 살아가는 일> 제1화.
원균. 우리 엄마 신 여사의 이름이다. 한자는 으뜸 원(元)에 고를 균(均)이다. 이름만 보면 으뜸 가운데 고르고 고른 사람이 우리 엄마다. 남자 이름으로도 센데, 여자한테 저런 한자를 쓰다니 이만저만 센 이름이 아니라 걱정된다고 사람들은 말했다. 이름하고 인생이 무슨 상관이라고, 팔자가 셀 거라는 둥 순탄치 않을 거라는 둥 나쁜 소리를 하는지 못 마땅했다. 하지만 엄마가 50대 중반에 암으로 세상을 뜨자, 너무 일찍 엄마를 잃은 게 이름 때문인 것 같아 그런 이름을 지어준 할아버지가 야속했다.
엄마는 줄줄이 딸만 셋인 집에서 넷째 딸로 태어났다. 넷째는 아들이기를 바랐던 집안 어른들은 여간 실망이 큰 게 아니었다고 한다. 갓 태어난 아기를 한참이나 방치한 것도 모자라, 다음엔 꼭 남동생을 보라는 염원을 담아 아들 돌림자에 들어가는 ‘균’자를 넣어 이름을 지어주었다. 신기하게도, 엄마는 연달아 세 명의 남동생을 봤다. 6.25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피난길에 남동생 둘을 잃었지만, 그래도 이름값을 톡톡히 한 것이다.
초등학교 수업 시간에 이순신 장군과 원균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날 이후, 엄마 이름은 내게 장난치기 좋은 대상이었다. 딱히 할 일도 놀 친구도 없어 심심해지면 “엄마, 원균이 누군지 알지. 이순신 장군을 모함한 간신이래.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응? 응?”하며 엄마를 졸졸 따라다녔다. 그럼 엄마는 또 시작이구나 하는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아이고, 내가 죄인이네. 그러는 은주 씨는 꼭 훌륭한 사람 되세요.” 엄마의 맞장구에 신이 나서 “당연하지. 내가 엄만 줄 알아.”라며 호기롭게 응수했다.
중학생이 되어서는 이름 대신 엄마의 성씨가 대상이었다. 국사 시간에 ‘사육신’과 ‘생육신’에 대해 배운 것이 구실이 되었다. 동료들을 배신한 ‘신숙주’와 숙주나물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순간 ‘신’ 여사가 떠올랐다. 장난 칠 생각에, 하교종이 울리자마자 득달같이 집으로 달려갔다. 헉헉 거리는 숨을 돌릴 틈도 없이 신숙주 아냐고 물었다. “알지, 왜?” 엄마는 심상치 않다는 듯 물었다. “그럼, 숙주나물 절대 안 먹겠네.” 이건 또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냐며 어이없이 웃었다.
지나치게 무례하거나 거짓말을 하는 경우가 아니면, 엄마는 어떤 장난을 쳐도 무슨 말을 해도 흔쾌히 받아주고 들어줬다. 내가 엉뚱한 소리를 하면 ‘얘를 어쩌면 좋냐’라는 듯 나를 쳐다봤는데, 그 눈빛에서 나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 느껴져서 좋았다. 장난 코드가 맞을 때는 웃겨 죽겠다는 듯 웃음소리가 점점 커지며 활짝 웃는 엄마를 보다가 나도 덩달아 미친 듯 웃었다. 너무 신나게 웃다가 눈물이 나올 때도 있었다. 엄마랑 그렇게 정신없이 웃으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 된 기분이 들었고, 내가 더 좋아졌다.
신 여사는 좋은 엄마이자 친구 같은 존재였다. 넉넉지 않은 살림에도 부족함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우리 남매를 키워냈다. 중학교 입학할 무렵, 엄마가 몇 년 동안 입을 것 먹을 것 아껴가며 집을 사기 위해 다달이 부었던 계가 깨져 버렸다. 엄마가 탈 차례에서 계주가 야반도주를 한 것이었다. 그때 엄마의 첫 마디는 지금도 생생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우리 은주 원아동복에서 옷이나 실컷 사주는 건데.”라며 내게 미안하다고 했다. 원아동복은 당시 유명한 아동복 브랜드였다.
엄마는 한동안 지인의 딸이 작아져서 못 입는 옷을 얻어다 내게 입혔다. 돈을 떼어서도 집을 못 사게 되어서도 아니고, 딸 옷 못 사준 게 가슴에 박혀 못내 속상한 사람, 우리 엄마 신 여사는 그런 사람이었다. 엄마에게 남동생과 나는 돈보다 집보다 세상 무엇보다 소중하고 사랑받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때문일까, 어린 마음에도 그 한마디가 어떤 말보다 더 슬프게 와닿았다. 집을 사서 2층에 내 방을 꾸며주겠다던 엄마는 방에 딸린 다락방을 예쁘게 꾸며주는 것으로 약속을 지켰다.
다락방은 벽 한 면이 창문이라, 낮에는 햇볕이 잘 들고 밤에는 별을 볼 수 있어 좋았다. 아이였던 내게는 2층 방보다 다락방이 상상을 펼치고 꿈을 꾸기에 더없이 좋은 공간이었다. 잼을 만들려고 사놓은 딸기 한 광주리를 다 먹어치운 일, 병 우유를 깨뜨리고 유리 조각을 하수도에 버려서 구멍이 막혔던 일, 벗기 귀찮아서 양말에 들어 간 돌을 꺼내려고 호기롭게 가위로 양말을 자른 일 등. 다락방에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남동생과 내 유년기의 추억이 한가득 담겨 있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한 가지가 더 담겨 있다.
“맛있었나보네, 잘 먹었네.”, “안 다쳤어? 유리처럼 녹지 않는 물건은, 휴지통에 버려야 돼.”, “발이 시원하니 좋겠네.” 혼내거나 싫은 소리 대신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말하며 잘못을 스스로 깨닫게 하는 엄마의 유쾌한 사랑이다. 형편이 어려운 시절이었기에 더 많이 힘들었을 테지만, 한 번도 우리에게 속내를 비춘 적이 없었다. 신 여사는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씩씩하고 쾌활했다. 그 기질은 자신의 삶뿐 아니라 양육 방식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덕분에 우리 남매는 자신감 있고 긍정적인 성향을 지닌 어른이 되었다.
동생은 자신의 아이가 생기면 우리 남매처럼 잘 키워달라고 엄마에게 부탁했다. 마찬가지 바람이었지만, 엄마는 내 딸이 네 살 되던 해에 하늘의 별이 되었다. 딸에게 울 엄마 같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 두렵지만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엄마가 되면 모두 그렇게 해낼 수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딸아이를 키우며 한 생명을 온전한 인간으로 성장시키는 일은 내 인생을 잘 살아내는 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막중하고 고된 일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모성애가 모든 엄마가 지닌 것이 아닌 개인의 선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숭실사이버대학교 기독교상담복지학과 이호선 교수에 의하면, 자기희생을 감내하는 모성애는 어떤 말을 사용하고 어떻게 행동할지와 같은 개인의 삶의 방식으로 선택 사항인 것이다. 모성애를 아름답고 훌륭하다고 하는 이유가 여기 있었다. 당연하게 여겼던 내가 받은 모든 것들이 자신의 희생을 전제로 한 엄마의 선택이었다는 사실에, 그 품이 얼마나 넓고 얼마나 깊은 사랑을 받았는지 절실히 느꼈다. 오늘도 나는 신 여사 같은 엄마가 되어보려고 애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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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북에 올려야 했는데, 잘못 발행해서 다시 올렸습니다. 공감해주신 독자님들 고맙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