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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unjoo Sep 18. 2023

존재와 실존에 대한 메시지

에르베 르 텔리에 ≪아노말리≫를 읽고, 책 서평 

≪아노말리(L’Anomalie)≫(민음사, 2022)는 프랑스 작가 에르베 르 텔리에가 쓴 장편소설이다. 


에르베 르 텔리에(Herve Le Tellier)는 작가 외에도 수학자, 기자 등 다방면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프랑스 작가다. 1991년부터 작가의 길에 들어선 그에게 노벨상, 부커상과 더불어 세계 3대 문학상 가운데 하나인 공쿠르상을 2020년에 선물한 작품이 바로 이 소설이다.  


이 소설은 작가가 2019년부터 회장직을 맡고 있는 국제적 실험 문학 집단인 ‘울리포(OuLiPo)’의 실험 정신이 담긴 문학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울리포’는 문학이 지닌 잠재성에 초점을 맞춰 새로운 현실을 창조해내고 창조해낸 현실을 재창조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재미를 안겨주는 작품을 만든다. 




소설 제목이기도 한 ‘아노말리’는 주로 기상학이나 데이터 과학에서 사용하는 용어로써 이상, 변칙이라는 뜻이다. 제목처럼 이 소설은 독자들에게 파리에서 뉴욕으로 향하던 비행기 탑승객들이 겪은 이상 현상에 관한 이야기다. 작가는 이 소설의 영감을 상상과 현실이 뒤섞인 작품 세계로 유명한 아르헨티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타인(The Other)≫에서 받았다고 한다.


2021년 6월 뉴욕으로 향하던 에어 프랑스 006기는 난기류를 만나 뉴욕 공항에 불시착을 요구한다. 무전을 받은 공항 관제탑은 비상이 걸리고 이 소식을 전달받은 북미방공사령부는 ‘프로토콜 42’를 실행한다. 비행 중 난기류를 만나 불시착하는 일이 국가비상사태가 되는 일어날 수 없는 초유의 사건이 되어버린 것이다. 에어 프랑스 006기 탑승객들이 미국 뉴저지 주에 있는 맥과이어 공군기지에 불시착하면서 보낸 3일을 전후로 이야기는 전개된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만이 현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해할 수 없는 현실도 존재한다. 때론 현실이 소설보다 더 허구라고 느껴질 때가 있다. 타임 슬립도 아니고 같은 시공간에서 자신과 똑같은 존재를 만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것 또한 현실이다. 살인이 타고난 재능이라고 믿는 청부 살인 업자 블레이크, 나이지리아의 관습으로 인해 성적 취향을 숨기고 뮤지션 활동을 하는 슬림보이, 아버지에게 성추행 당하는 6살 소피아를 비롯한 243명은 앞으로 자신들이 겪게 될 일은 상상도 못한 채 2021년 6월, 에어 프랑스 006기에 탑승한다. 


“인식, 지성, 심지어 천재성까지도 늘 뛰어넘는 기막힌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몰이해다.”(p.9, 1부, 하늘처럼 검은)


삶에 파문을 일으키는 비일상은 언제나 예고 없이 찾아온다. 세상은 예측이 불가하다고 말하면서도 사람들은 종종 자신의 앞날을 알 수 있다고 믿는다. 어제와 오늘이 그다지 크게 다를 바 없는 일상을 살던 탑승객들은 오늘과 별반 다르지 않은 내일을 예측하며 비행기에 탔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자신들과 똑같은 존재인 2021년 3월 탑승객들과 구분 짓기 위해 소피아 6월, 조애나 6월로 불리며 타국 공군기지에 억류되어 있다. 이것은 그들이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꿈같은 현실이다. 


“실존은 존재에 앞선다. 그것도 꽤 한참.”(p.189, 2부. 삶은 한낱 꿈이라고들 하네)


어떤 삶을 살 것인지는 자신의 의지에 달렸다. 이것은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에어 프랑스 006기에 타고 있던 승객들처럼 어느 날 갑자기 자신과 똑같은 존재를 마주하게 되는 황당한 일을 겪게 된다면? 드디어 만난 3월 탑승자와 6월 탑승자의 모습을 통해 작가는 독자들에게 삶이란 자신의 의지로 만들어가는 것임을 보여준다. 나이지리아 뮤지션 슬림보이처럼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며 함께 슬림멘으로 살 수도 있고, 청부 살인 업자 블레이크처럼 오직 자신만 인정하며 살아갈 수도 있다. 


“네 인생을 훔치고 싶지 않아. 한쪽 조애나가 콧물을 홀짝인다. “나도 그래.” 내 인생도 잃고 싶지 않아.”(pp.364~365, 3부. 무(無)의 노래)   




문학이 독자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삶에 대한 끊임없는 문제 제기가 아닐까. ≪아노말리≫, 이 책은 삶을 어떻게 살 것인지, 다양한 상황들 속에 독자들을 끌어들여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현실을 살아갈 힘을 스스로 갖도록 만들어주는 장편소설이다. 


2022년 서울에서 열린 국제도서전에 초청작가로 참가한 작가는 “인생에서 두 번째 기회를 갖는다면 무엇을 바꿀까?” (서울신문, 2022.06.02.)라는 신문사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신의 의지로 결정한 존재의 양태와 가치관, 나를 사랑하는 존재들은 나눌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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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unjoo [아노말리, brunch's 책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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