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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unjoo Jul 11. 2023

사서, 고생하는 직업이 천직이라면

동반자가 되어 보면 어때요? - 열일하는 무적 사서 은주 이야기  

새까만 하늘에 별만 반짝이는 가로등 하나 없는 시골길을 할머니 등에 업혀 집으로 돌아가던 나의 유년시절이 엊저녁 일처럼 생생하다. 


그때 할머니는 내 나이쯤이었을까. 한 살 터울 남동생과 시골 할아버지 댁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나는 아직까지도 그곳의 기억이 잊혀지지 않는다. 아니 잊혀 질까 두려운 추억이다. 내 소중한 삶이 시작된 고향이자, 내 인생의 뿌리를 내려준 조부모님과의 따뜻했던 그 시절을 어찌 잊을 수가 있을지. 상상할 수도 없다. 




우리 할머니는 밤마실을 좋아했다. 나는 그런 할머니를 따라가서 누군가 들려주는 옛날이야기 듣는 것이 무척 좋았다. 이야기를 듣다가 궁금한 대목이 나오면 언제든 물어봐도 기특하다며 대답해 주시는 어른들도 좋았다. 우리 할머니가 되기도 하고 영희 엄마가 되기도 하고 이웃 분들이 돌아가면서 화자가 되었다. 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워서 듣는 이야기에서는 호랑이도 의좋은 형제도 한 맺힌 원귀도 나왔다. 너무도 많은 등장인물과 뭔지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럴듯한 상황들이 펼쳐졌다. 초등학교 입학식 전날에 엄마와 함께 서울로 왔으니, 7살까지의 일들이지만 내 인생에 방향을 잡아주기에는 결코 부족하지 않았다. 




그렇게 조부모님 댁을 떠나 서울 집에서 살게 된 나는 멀리 떨어져 들을 수 없게 된 할머니의 이야기 대신 교과서에 수록되어 있는 문학 작품에 재미를 들였다. 하얀 것은 종이고 까만 것은 글씨, 책에 대한 우스갯소리다. 하지만 나에게는 다르다. 하얀 것은 무궁무진한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무한한 공간이었고 까만 것은 나와 대화하는 상대방이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학창 시절 제일 좋아했던 것은 삼국지와 수레바퀴 아래서, 그리고 교과서였다. 할머니의 이야기가 좋았고 책이 재미있었던 나는 우리 엄마의 조언대로 사서(司書)가 되었다.


사서(司書), 언제부턴가 사서 고생하는 직업이라고들 한다. 철인도 겁낼 무거운 책들과 키보드와 함께 일상을 보내다 보면, 어느 순간 의학 프로그램에서 보던 각종 근골격계질환이 나의 것이 되어 있는 현실을 마주하게 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10년을 알고 지내던 사서가 연수에 나오지 않게 되면, 십중팔구는 심각한 근골격계질환 때문에 휴직을 했거나 퇴사한 경우다. 한 차례의 회전근개파열을 극복했고 고관절 수술을 앞두고 있는 나는 여전히 동료들 사이에서 운이 좋은 편에 속한다. 질환의 크기는 어마 무시할 수 있지만 아픈 곳의 종류로 따지면 고작 두 가지니. 정작 당사자인 나는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수술 생각만 하면 공포감이 밀려온다.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사서라는 내 직업이 참 좋다. 고맙고 소중하고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 것 같다. 남자 사람하고도 결혼을 했으나, 나는 사서라는 직업과 결혼을 한 것 같다. 서로 다른 남남이 만나서 알아가고 이해하고 성장해 가는 결혼처럼, 사서라는 직업과 내가 만나 함께 보낸 30년 가까운 세월은 우리가 서로에게 친밀감을 형성하고 커나가는데 충분한 시간이 되었다. 3년이 지나니 일과 친해지고 10년이 지나니 일에 익숙해지고 20년이 지나니 사서란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되었다. 30년이 다가오니 이제 사서로서 내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 보인다. 


“결국 인생은 우리 모두를 철학자로 만든다.”, 프랑스 사상가 모리스 리즐링의 말처럼 우리가 사는 인생이 우리를 만든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성실히 부지런히 열일하며 내 평생 동반자이자 천직인 무적 사서로서 살아간다. 

by 은주 [사서주페어's shiny 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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