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전직 알바왕, 버티게 해 준 것과 무너뜨린 것

궁핍했을 시절 아주 커다란 것을 깨달았다

by 글로긍지

난 아르바이트를 참 많이도 했다. 단타 치기로 자주도, 다양하게도.

독립적으로 살아보려는 시도이며 세상에 나서고 싶다는 선언이자 생계를 위한 몸부림이었다.


독립이라.

‘신체적 독립, 정신적 독립, 경제적 독립...’

단계도 여럿이겠으나.


"네 인생이야."


어릴 적부터 부모님은 나를 독립적인 인간으로 이끄셨다. 위의 말을 자주 들었다. 즉, 네 인생은 네 몫, 네 선택은 네 책임, 얼른 독립하거라, 어차피 알아서 갈길 가며 지내야 한다... 그 말들은 양날의 검이었다. 난 독립 지향 의식이 투철하게 깃든 동시에 의지할 데가 없다는 생각도 종종 했다. 세상에 내던져진 기분도 들었고, 부모님과 잘 상의하지 않았다.


혼자서 학원을 알아보고 등록을 부탁드렸고, 대회나 공모전도 알아서 찾아 나갔으며, 공부도 나름 알아서 했다. 물론 '완전히 혼자서 척척 잘해요!'라고 할 수는 없다. 경제적 지원도 있었고, 부모님의 입장과 시선은 다소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이건 동의하실 거다. 부모님은 지나치게 내 삶을 관리하거나 떠미는 타입은 아니셨다. 어릴 적에는 학습지든 학원이든 시키시긴 했으나 이조차도 점점 풀어주셨다.


정리하자면 난 미흡했고 미성숙했고 부족했지만 ‘독립을 해야 한다는 의식’ 자체는 진했다는 거다.


그래도 나는 꿈이 있고, 강하고, 단단한 아이였기에. (꿈 없으면 시체 수준이라 자부한다.) 누가 시키거나 고민해주지 않아도 진로와 비전 면에서는 실행력과 추진력과 의지력이 굉장했다. 그것은 살아가며 겪는 고난과 시련에도 지탱할 수 있는 기둥이었고, 복이고 행운이다.


아무튼 혼자 서울로 가게 되었던 건 20살 대학 입학 시기부터였다. 4군데에 지원했고 괜찮은 연극영화과에 붙었다. 굳이 가지 않고 곧바로 일을 할 다짐도 되어있었건만 막상 닥치니 감사히 갔다.


부모님께서는 기숙사를 끊어주셨고 일주일에 10만 원씩 용돈을 주셨다. 나만 그런가? 매번 잔고는 0원이 되었다. 친구들과 맛있는 밥 몇 번 먹으면 3분의 1이 사라졌는데 생필품도 사야 하고 미용실도 가야 하니. 당시에 나는 경제 개념이 없었고 무턱대고 알바부터 찾기 시작했다.


“식당 홀서빙? 카페? 피시방?”


아니.

난 하드 하게 시작한 케이스다. 택배부터 달렸다. 당장 바로 돈을 얻을 수 있는 알바는 내가 알기론 그것이었다. 택배의 허브라는 곳에 갔는데 신세계를 경험했다. 보통 여자는 작은 상자가 있는 곳으로 배치가 되는데 관리자가 나를 발견하지 못했다.


“저는 어디로 배치되나요?”


뒤늦게 졸졸 따라가 물으니, 관리자는 곤란하게 머리를 긁으며 가장 무거운 물건들이 있는 곳으로 쿨하게 보내버렸다.


“가! 넌 못해. 나가라고!”


어리고, 여자고, 힘없어 보이는 것이. 차라리 도망이라도 가라고, 관리자한테 말해서 바꾸라고 고래고래 성을 내셨던 라인 담당 아저씨.(워낙 하드한 구역이라 날 걱정하셔서 억세게 굴으셨다는 것을 안다.) 결국 함께 전장을 이겨낸 것처럼 동료애로 다져져서 야간이 끝나고 12시간 후 동이 틀 아침에는 환하게 웃어주셨다.


레일은 무서웠고, 상자는 무거웠고, 뼈는 욱신거리고, 머리는 어지럽고, 땀범벅에 총체적으로 험난했다만.


“너 참 대단하다.”


그 한마디에 뿌듯해했다. 하지만 극심한 몸살이 나서 대학교 수업을 결석했다는 창피한 얘기다.


20대 초기에는 용돈도 받고, 알바도 병행했다.

그러다 알바를 점점 더 많이 하기 시작했다. 생활은 빠듯하지, 단편 영화를 찍으려면 돈도 쓰이지. 거의 병리적인 수준으로 틈 날 때마다 알바 사이트와 어플을 뒤졌다. 용돈은 되도록 안 받는 사람이고 싶은 욕심도 나를 그 길로 이끌었다.


택배(상하차, 포장 포함 4군데), 식당, 카페, 공장, 옷가게, 물놀이장, 네일 모델, 영화 스탭, 안내데스크, 회계사무소, 학원 선생, 보조출연, 강의 녹화...


큰 회사 제외, 기억하는 알바만 적으면 이 정도다.


이후 알았다. 글을 쓸 때 연륜과 경험이 왜 필요한지. 글은 세상과 사회를 담아내는 작업인데, 그것을 직접 경험하면 쓸 고증이 훨씬 많아지긴 한다. 반대로 갇히기도 한다. 현실성에 매몰되니까.


안 해본 것도 많지만 뭐든 열심히 했다. 면접을 볼 때마다 최선을 다했고, 적정선 이상으로 긴장도 했고, 진상을 만나도 웃었고, 힘들어도 참았고, 몸살도 났고, 그만둔다고 나약하게 말하기도 했고, 직장 관계에서 회피하고 도망치기도 했고, 일찍도 갔고, 지각도 해봤고...


그때 번 돈은 한달살이용도로 그때 다 썼다.

그나마 부릴 사치는 (과장해서) 초코우유, 초코크림빵 정도.

무용담처럼 떠벌리지만, 누군가는 눈살을 구긴다.


“알바 많이 한 게 자랑이야?”


응. 자랑 맞다. 나 고생했고 그만큼 배웠으니까 자랑스럽다.


하지만 이제 알바는 안 하기로 결심했다.

내 일을 하려고.

누군가 고민한다면 추천은 하고 싶다.

치열하게, 누군가의 밑에서, 하기 싫은 일도 해가며, 작은 돈을 운용해 가며...

값진 깨달음이 생긴 것 같다.


그 깨달음은 시골 귀향이었다.

왜냐고?


“독립을 지향했던 딸이 품을 좋아하고, 독립을 장려했던 부모님도 귀향을 환영해.”


아이러니하게도, 부모님의 품에 다시 들어왔다. 알아서 잘 살 거라고 큰소리치던 딸이 돌아온 것에 대해 부모님은 격하게 환영하셨다. 서울에 있을 7년간... 명절에도 내려오지 않고 일한다고 나대던 딸이 오니까 좋다고.


참, 신기하다.

요새 연어족이라고 하던가.

다 큰 딸이 부모님 집에 있는 게 못마땅하기도 할 테지만.

세상은 정답 없는 모순 투성이다.


“우리 딸이 와서 너무 좋아. 계속 오래 있다가 가. 또 언젠가 떠난다면 가야겠지만 있고 싶다면 얼마든지 있어.”


은은한 미소의 답변이 내게 닿았다.

부모님은 모르시지만.

7년간 떠돌았을 때.


알바도 하고, 자취도 하고, 독립적으로 강인하게 생활하려 했다. 어렵지 않았다. 꿈이 있으니까. 하지만 종종 꿈마저도 희미하게 만드는, 무너뜨리는 것이 있었다.


“앞으로 부모님을 얼마나 더 볼 수 있지?”


새어보니...

1년에 한두 번 갈까 말까 하면.

횟수를 숫자로 셀 수 있게 된다.


“안 되겠어.”


그래서 내려온 이유가 가장 크다.


하기 싫고, 어렵고, 고독하고, 인정받을 것도 잘 없는 알바를 할 때 정말 사무치게 생각나서 마음을 흔들던 건 가족이었다.

부모님이었다.


아무튼.

서울에서 독립적인 삶을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부모님을 마주한다는 것의 소중함을 깨달은, 다소 인과관계가 이상한 썰이었다.


“잘하자, 효도하자! 오늘도 다짐한다!”


#. 오늘의 명대사 드라마 <미생>
"살면서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질 수 있어. 파리 뒤를 쫓으면 변소 주변이나 어슬렁거릴 거고, 꿀벌 뒤를 쫓으면은 꽃밭을 함께 거닐게 된다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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