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숙한 남성 08 - 모성애에 대응하는 질서의 수호자
자식들이 대립할 때 어머니는 누구 편을 들까요? 가족 경제가 파탄날 위기에 처했을 때, 저의 가족들은 한 자리 모여 앞으로의 대응방안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그러다 의견이 갈렸습니다. 하지만 저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제 견해가 더 옳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부실 자산(분양 받은 상가)을 팔아 추가로 발생할 손해를 막으면, 약간의 손실로 이 사태를 매듭 지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제가 생각한 최선의 방안이었습니다.
어머니에게 여러 번 진지하게 말씀드렸습니다. "여기서 손을 떼면, 우리에게 더 이상의 손해는 발생하지 않는다. 반대로 한 번 발을 들여넣게 되면 이미 들어간 비용이 생각나, 점점 매각하기가 힘들어진다. 수렁에 빠지는 거다. 그러니 잘 생각하셔야 된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동생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상황이 좋아질 때까지 대출 이자를 내며 버티자"였습니다. 경기 예측에 근거한 제안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미련과 욕심에서 비롯된 주장이었습니다. 본인이 꿈꾸었던 부자 라이프를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기 싫었는지, 아니면 본인 잘못이 확정되는 그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가족 모두를 밀어넣는 주장이었던 것은 분명했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판단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보아 온 어머니는, 현명하고 긍정적이며 뛰어난 역량을 지닌 제 인생의 롤모델이었습니다. 와이프에게도 종종 말했습니다. 저는 어머니 같은 사람이 되겠다고…
어머니는 버티기로 결정했습니다. 제 의견과는 달랐지만, 그때에도 저는 어머니에게 다른 복안(腹案)이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점점 심각한 상황에 직면하면서, 어머니가 대책없이 내린 결정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또, 자식간의 의견이 엇갈렸을 때, 저 아닌 동생의 손을 들어주는 것을 보면서, 도대체 기준이 무엇인지 혼란스러웠습니다. 시비(是非), 즉 옳고 그름이 기준이 아니었습니다. 제 말이 도덕, 윤리, 논리에 부합해도 제 손을 잡아 주지 않았습니다. 손익(損益), 즉 손실과 이익도 기준이 아니었습니다. 손실을 회피하고 우리 가족 모두에게 이익에 되는 방안을 누차 말씀드려도 제 소리에 귀 귀울여 주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보니, 어머니는 불쌍한 놈 편을 들어 주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깨달았을 때 저는 절망했습니다. 어머니를 제 편으로 만드는 방법이, 제가 더 불쌍해 지는 것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옳음을 말해도, 또 누차 이익을 강조해도 소용없었습니다. 당시 저희 상황은, '우는 아이 사탕 하나 더 준다'는 옛말에서 말하는 사탕 하나 더 주냐 마냐를 정하는 안일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태풍에 몰아치는 바다 한복판에서, 난파선 되기 직전의 배를 어떻게든 살려내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선장이 불쌍한 놈의 말을 듣고 배의 방향키를 돌린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요? 배 무게를 줄이기 위해 짐을 버려야 하는데, 돈 욕심에 '짐 버리지 말자'는 선원이 불쌍해 그 말을 들어 그대로 항해를 고집한다면, 과연 그게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판단일까요? 저는 너무나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 “모성애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답을 접하면서, 의문이 풀렸습니다. “모성애란 무력한 존재에게 대한 무조건적인 긍정”(에리히 프롬, 세계적인 사회심리학자, 생몰년도 1900~1980)입니다. 어머니들은(여성은) 본성적으로 무기력한 존재 - 예를 들어 갓 태어난 아기, 연약한 아이들을 조건 없이 사랑합니다. 그 마음이 확장되면, 길가에 핀 바람에도 날라갈 것 같은 꽃 한송이에 정(情)을 주고, 길 잃은 고양이, 버려진 강아지를 불쌍히 여겨 데려다 키웁니다.
어머니가 못난 자식 편을 드는 것은, 그 아이가 옳아서도 아니고 어떤 조건을 클리어해서도 아닙니다. 그냥 불쌍해서입니다. 그게 모성애의 본질입니다. 이 사실을 알았을 때, 저는 뭐라 말할 수 없는 심정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성애의 최대 수혜자가 저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머니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습니다. 어떠한 상황에 처해도 어머니는 저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주셨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삽으로 땅을 파고 있으면 그곳에서 석유가 나오니까 아들이 저런 행동을 하신다고 믿으실 분입니다. 어머니에게는 단지, 저말고 그런 아들이 하나 더 있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세상 모든 어머니는 자녀를 시비(是非)와 손익(損益)으로 다루지 않는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이는 훈육에 관한 말이 아닙니다. 가족 전체가 살기 위해 누군가를 절벽에서 밀어야할 극단적인 상황에서 어머니는 자녀를 시비(是非)와 손익(損益)으로 판단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렇기에 모성애는 한편으로 참 대단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이런 모성애에도 그늘이 있습니다. 넷플릭스 드라마 전란(戰亂), 극중에서 임금 선조는 "박애(博愛)가 혼란을 부른다"고 했습니다. 모두를 똑같이 사랑하기에, 기준이 서지 않고 구별이 없어집니다. 필연적으로 혼돈을 야기합니다. 비슷한 의미로, 무조건적인 긍정은 무질서를 초래합니다. 무질서는 규칙, 규율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자식에 대한 사랑이 극한에 이르면, 모든 사건에서 예외를 만들어 냅니다. 즉 자녀가 아무리 나쁜 짓을 저질러도 품으려고 하며, 상식적인 판단을 거부합니다. 소설, 영화, 드라마에서 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자식 사랑에 눈이 멀어, 사리분별하지 못하는 케이스를 많이 접할 수 있습니다. 모성애는 여성의 본성입니다. 본성은 거스릴 수 없는 것이기에, 스스로 제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바로 잡아야 하는데, 그 역할을 해야 하는 사람이 바로 가장(家長)인 아버지입니다.
가정의 질서는 아버지가 세워야 하며, 아버지가 지켜야 합니다. 아버지는 질서의 수호자입니다. 저는 어떻게 하면 질서를 세울 수 있을까를 고민해 보았습니다. 저희 집의 가장인 제가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하면 모든 가족 구성원(아내와 자녀)들이 저를 따를까요? 회의적입니다. 잘못하면 권위만 앞세우는 꼰대가 되어, 나머지 가족들에게 상처 줄 수 있습니다. 반목과 분란만이 커져 갈 수 있습니다. 제가 찾은 답은 “비전 제시”였습니다. 우리 가정이 나아가야 할 공통의 목표 - 비전을 되풀이 말하고,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고 그것을 하나씩 몸소 실행하는 일입니다. 모든 구성원의 눈을 목표(비전)에 고정시켜야 원칙이 만들어집니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하지 않으면, 그것이 질서입니다.
대단한 것만이 비전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함께 꿈꾸는 모든 미래는 비전이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외벌이 남편이 아내에게 전업주부를 제안하며 육아와 가사를 소홀히 하지 말 것을 당부하는, 남편과 아내 역할을 분담하는 라이프 스타일도 비전이 됩니다. 반대로 더 좋은 주거 환경(예를 들어, 학군지로의 이사 등)을 위해, 맞벌이를 하며 서로가 양육 부담을 나누어 지는 대신 필요 없는 소비를 줄이자는 것도 비전이 됩니다. 질서란 어떻게 살아야 가야 하는가에 대한 청사진의 제시로부터 시작됩니다.
비전을 제시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나서부터 저는 어머니에게“금리가 인하되면 대출 이자가 줄고, 임차인이 들어올 좋은 여건이 된다. 이제 금리 상승에서 금리 인하로의 전환이 일어날 시기이니 조금만 더 버티면 숨통이 틔일 것이다.”라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시간이 지났는데, 왜 금리 인하가 더디냐?”라는 어머니의 불만이 있었지만, 적어도 우리의 눈을 금리 인하로 고정시킬 수는 있었으며, 그 희망을 안고 이 상황을 견뎌낼 힘을 조금이라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되고 싶은 아버지는 비전을 제시하며, 가족 구성원의 공감을 이끌어 내는 사람입니다. 또 비전을 위해 구체적으로 실행하며 원칙을 세우는 자입니다. 원칙에 위배되는 행동에 있어서는 “하지 말라”고 분명하고 말하고 강제할 수 있는 가장입니다. 질서를 세우고 지키는 수호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