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전기 벽화 속의 거북(1)-조선의 무덤 조성 방식
고려시대 석실묘의 전통은 조선 전기까지도 왕실과 고위 양반층을 중심으로 이어져 왔다.
그러나 조선 성리학의 지배가 공고화되고, 불교식 상장례를 폐지하기 위해 정리된 『국조오례의』에서부터, '석실묘'보다 검소하고 성리학의 예법에 맞게 조선의 공식 묘제는 ‘회격묘’로 채택되었다.
'회격묘'는 처음 세종의 장인인 '심온'의 사후 세종이 관곽과 석회를 내렸다는 기록이 처음 실록에 등장했다. 이러한 방식이 계속 사용되다가 임진왜란 전후 복잡한 사회상을 반영하듯이 그 후 『주자가례』식의 '회곽묘'로 변화하였는데 '회격묘'보다 석회의 양이 적게 들어간다. 아마도 이것은 왜란 전후 물자 부족에서 기인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지만 '회곽묘'보다 '회격묘'가 더욱 견고하여 조선 전기에서 임진왜란 전까지 유행하였다. 이 단단함으로 도굴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돌과 같이 굳어 물과 벌레도 접근이 어렵다.
세조 사후 조성된 광릉(光陵) 이후, '회격묘'는 양반 계층에서부터 평민들에게까지 일반화되면서, 고분벽화는 이후로 나올 수가 없게 되었다.
'회격묘'와 '회곽묘(灰槨墓)'는 석곽과 석실을 만드는 대신에 석회 3, 가는 모래 1, , 황토 1을 섞어 누릅나무 껍질의 끎인 물로 만든 ‘삼물(三物)’을 부어서 굳게 함으로써, 관 또는 곽을 놓을 자리를 만들어 광중(壙中)을 단단히 한 후 목관과 목곽을 안치하는 방식이다.
아래 <그림>은 '회격묘'와 '회곽묘'의 조성방식을 나타낸 것이다.
다음 장에서 조선 전기에서 <사신도>가 그려진 유일한 고분인 원주 동화리 노회신 묘의 벽화 속 '거북'을 살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