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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슬비 May 24. 2023

민화 속 '거북 도상'의 변화와 상징 이야기(26)

『흉례에 관한 의궤』에 묘사된 '거북(현무)' 도상(3) 

2. 『의궤』에 묘사된 거북 도상의 변화     

   가. 거북 도상 형태의 시대적 변화     

   『의궤』에 묘사된 거북은 ‘귀사합체’의 형태로 먼저 나타났는데, 가장 빠른 것이 인조 5년 1627년의 

  『원종예장도감의궤』이며, 이러한 형태는 1731년 『(인조)장릉천릉도감의궤』까지 나타난다. 

       이 형상은 거북의 몸을 뱀이 휘감으며 뱀과 거북이 서로 마주 보고 있는 형태를 하고 있어, 고구려 고분벽화 <사신도>의 ‘현무’와 매우 유사한 형태임을 알 수 있다. 이 ‘귀사합체’에서의 거북 도상은 ‘거북 단독’일 때와 비슷하지만, 거북과 뱀의 합체인 형상을 하고 있어 ‘거북’만이 중심이 될 수 없어, 거북의 표현에 있어 세밀하지 못한 점이 있다. 

      거북의 자세는 초기에는 엎드린 듯한 모습을 하다가 점차 일어서서 걸어가는 듯한 모습으로 그려지며, 거북 발가락 표현도 양서류의 물갈퀴처럼 그려지다가, 점차 발가락이 하나씩 구분되면서 발톱까지 세밀하게 그려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거북과 뱀의 두상의 크기도 크게 차이 나지 않으며, 거북과 뱀은 대부분 청색이나 먹으로 채색되어 있고, 귀갑의 끝으로 주홍이나 황색 띠로 처리되어 있다. 뱀의 안쪽 면은 대부분 적색 계열로 채색 또는 문양을 주었으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콧등, 혀, 입 주변이 적색으로 채색되어졌다. 

    『원종예장도감의궤』에서 1632년 『인목왕후목릉산릉도감의궤』까지 거북의 진행 방향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면서 뱀을 올려다보거나 고개를 돌려 뒤돌아보고 있지만, 1649년 『인조장릉산릉도감의궤』에서는 거북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가면서 뱀을 돌아다보는 형식으로 바뀌는데, 이것은 고구려 고분벽화에서의 ‘현무’와 같은 동세(動勢)로 이후 계속 이러한 모습으로 그려졌다.

<인목왕후목릉산릉도감의궤(1632, 인조 10년), 규장각 소장, (선조의 계비)>

    『효종대왕영릉산릉도감의궤』(1659년)에서 거북의 다리 앞면에 붉은색의 단순한 초기 형태의 화염문(火焰紋)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1721년 『숙종명릉산릉도감의궤』에서는 현존하는 화염문의 형태로의 완전한 모습을 갖추게 되는데, 이 화염문은 조선 중기 이후의 거북 도상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효종대왕영릉산릉도감의궤(1659년, 현종 즉위), 장서각 소장>
<숙종명릉산릉도감의궤(1721, 경종 01년), 외규장각 소장>


    『원종예장도감의궤』에서는 뱀의 머리가 거북의 머리보다 높이 있지만, 점차 두 신수(神獸)의 두상 높이가 대등한 눈높이로 가다가, 심지어 『장렬왕후휘릉산릉도감의궤』(1689)에서는 뱀의 머리가 거북의 머리보다 낮아지기도 한다. 

<장렬왕후휘릉산릉도감의궤(1688, 숙종 14년), 장서각 소장, (인조의 계비)>

    또한 뱀의 꼬리는 초반에는 굵기가 굵고 거북의 등보다 높이 하늘을 향해 치솟아 있었지만, 점차 뱀의 굵기는 가늘어지고 길이도 짧아지며, 꼬리도 거북꼬리 밑으로 낮아지는 모습도 보인다. 『숙종명릉산릉도감의궤』(1721년)에서는 뱀의 꼬리가 거북의 뒷다리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귀사합체’의 ‘현무’로서의 거북과 뱀이 서로 대등한 위치에 있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뱀의 위상이 점차 낮아지고, 종국에는 완전히 뱀이 사라지면서, 오로지 ‘거북’만 남게 되는 일련의 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거북 단독’의 형태가 최초로 나타난 것은 18세기 중엽부터로, 이 형상은 1757년(영조 33) 『정성왕후홍릉산릉도감의궤』에서 나타난다. 


    이때부터 ‘서수(瑞獸)’로서의 현무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좀 더 현실 속의 모습과 가까운 거북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어, 『의궤』에 묘사된 ‘현무’와 <십장생도> 속의 ‘거북’ 도상과 더욱 흡사해짐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적 묘사는 <어해도>와 같은 곳에서도 나타난다. 이것은 조선 전기 성리학자들이 사물을 볼 때, ‘완물상지(玩物喪志)’를 경계하며, 사물을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기를 주장하던 것에서 벗어나, 18세기로 오면서 북학파 실학자들의 ‘마음’이 아니라 ‘눈’으로 보는 것을 중시한 ‘관물 인식’의 변화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거북은 그 후로 계속 ‘거북 단독’의 형태로 보이다가, 19세기 전반인 순조 연간 1816년(순조 16) 『헌경혜빈빈궁혼궁도감의궤』, 1821년(순조 21) 『효의왕후빈전혼전도감의궤』와 1823년(순조 23) 『현목수빈빈궁혼궁도감의궤』에서 ‘귀사합체’의 모습으로 잠시 나타난다. 

<효의왕후빈전혼전도감의궤(1821년, 순조 21년), 외규장각 소장, (정조의 정비)>
<현목수빈빈궁혼궁도감의궤(1823년, 순조 23년), 외규장각 소장, (정조의 후궁, 순조의 母)>

    영조는 『국조상례보편』(1752년)을 편찬하면서, 왕세자, 왕세손과 비빈(妃嬪) 등의 상(喪)인 '소상(小喪)'과 '소내상(小內喪)'의 '찬실(欑室)'에는 <사수도>를 그리지 않는다는 규정을 포함하여 <사수도>의 유무를 통해 '찬궁'과 '찬실'의 위계를 정했다. 


    그러나 주로 『산릉도감의궤』에서 그려졌던 <찬궁도>와 <사신도>가, 순조 연간에는 『빈전혼전도감의궤』에서도 그려졌다는 점,  또한 『국조상례보편』의 편찬 의도와는 달리 소내상인 『빈궁혼궁도감의궤』에서도 <사수도>가 그려져 있다는 것은 추후 연구의 필요성을 느끼게 한다.


    또한 거북의 도상 역시 이 시기는 사실적인 거북 도상이 그려졌던 시기임에도 17세기 전반, 즉 1627년 『원종예장도감의궤』에서 그려졌던 ‘귀사합체’의 형식으로 회귀(回歸)하였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1821년(순조 21) 『효의왕후빈전혼전도감의궤』와 같은 해 편찬된 『정조(효의왕후)건릉산릉도감의궤』에서는 ‘거북 단독형’의 모습으로 다시 나타난다.

<정조(효의왕후)건릉산릉도감의궤(1821, 순조 21년), 규장각 소장, (정조의 정비)>

    ‘거북 단독’일 때의 거북은 거북의 실제적인 표현이 많이 드러나, 귀갑의 형태와 무늬가 더 세밀해지며, 뚜렷한 육각형의 귀갑문 모양을 보인다. 거북 두상은 용의 형상에 가까워졌으며, 발 모양의 묘사도 더 세밀해졌다. 또한 콧등과 눈 주위, 입과 다리 앞면 부의 화염문은 적색으로 채색되었고, 귀갑의 아랫부분이 주홍색 또는 황색의 띠로 처리되어 있다. 


    거북 도상의 묘사와 색채는 『의궤』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으나, 전체적으로 세밀해지면서 화려해지고, 화염문은 그대로 유지되는데, 더욱 선명해지고 정교해진다. ‘귀사합체’의 거북은 발가락이 세밀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았지만, ‘거북 단독형상’에서는 발가락이 확연하게 구분되며 발톱까지도 표현되어 있다. 


   ‘귀사합체’와 ‘거북 단독 도상’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것은, 거북의 입에서 나오는 상서로운 기운인 서기가 표현되어 있고, 벽사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청색을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의궤』의 거북 도상은 대부분 채색화인데, 순조 5년(1805) 『정순왕후원릉산릉도감의궤』와 1834년 『순조인릉산릉도감의궤』는 채색 없이 먹선으로만 그려져 있다. 그러나 거북 도상이 먹선으로만 그려졌다는 점만 제외하면, 표현에 있어서는 다른 도상처럼 세밀하게 표현되어 있다. 반듯한 육각형의 귀갑문과 다리의 화염문, 발가락의 표현, 연갑판과 배(腹)의 얼룩무늬와 서기의 표현까지 세심하게 표현되어 있다.

<정순왕후원릉산릉도감의궤(1805년, 순조 05년), 규장각 소장,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원릉산릉도감의궤』에서는 특이하게 거북의 꼬리가 6개로 표현되어 있다. 

앞 전 시대의 거북꼬리는 모두 1개로 표현되었고, 짧고 뭉툭하거나 길게 표현되었으나, 점차 꼬리가 넓어지면서 분리되지 않고 한 줄기씩 표현상 구분되는 모습으로 변해가다가, 『정순왕후원릉산릉도감의궤』에서는 6개의 꼬리로 분리되어 나타난 것이다. 이후 『의궤』에서 보이는 거북 도상에서는 2∼3개의 꼬리를 가진 모습으로 많이 그려져, 장수를 기원하는 기복적인 성향이 깊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고대 중국 문헌인 『술이기』에서 ‘거북은 천 살에 털이 생기고, 5천 살이 되면 신귀라 하고, 만 살이 되면 영귀라 한다.’라는 기록과 『백공육첩』에서는, ‘거북은 100살이면 하나의 꼬리가 나오므로, 1000살이면 꼬리가 열 개가 된다. 200살 먹은 것을 일총귀(一總龜)라고 하고, 1000살 먹은 것을 오총귀(五一龜)라 한다.’라는 내용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의궤』에서 ‘귀갑문’의 형태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데, 1800년 제작된 규장각 소장의 『정조건릉산릉도감의궤』에서는 기존 귀갑문의 문양 형태가 반듯한 육각형 모양의 선묘로 반복되던 모습에서, 귀갑문의 육각형이 물고기 비늘처럼 겹쳐진 모양으로 변화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정조건릉산릉도감의궤(1800, 순조 즉위), 규장각 소장>

   그러나 그 후 제작된 『의궤』에서는 『정조건릉산릉도감의궤』이전으로 돌아가 반듯한 육각형 문양을 보이다가, 1843년 제작된 외규장각 소장의 『효현왕후경릉산릉도감의궤』에서는 육각형의 문양이 길게 늘어지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효현왕후경릉산릉도감의궤(1843년, 헌종 09년), 외규장각 소장, (헌종의 정비)>

   같은 해 제작된 규장각 소장의 『효현왕후경릉산릉도감의궤』에서는 다시 『정조건릉산릉도감의궤』에서 보이는 귀갑문의 육각형 문양이 물고기 비늘처럼 겹쳐진 모양으로 그려지면서, 이후 『의궤』에서 귀갑문의 형태는 비늘 모양처럼 겹쳐진 형태로 그려진다. 

<효현왕후경릉산릉도감의궤(1843년, 헌종 09년), 규장각 소장, (헌종의 정비)>

   1863년 『철종예릉산릉도감의궤』에서 각진 육각형의 모양의 끝이 살짝 둥그스름해지기 시작하며, 장서각 소장의 1919년 『고종태황제산릉주감의궤』에서는 육각형의 각이 거의 사라지고, 물고기 비늘 모양으로 바뀌기 시작하여, 1926년 『순종효황제산릉주감의궤』에서는 완전히 물고기 비늘 모양으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철종예릉산릉도감의궤(1863년, 고종 즉위), 규장각 소장>
<고종태황제산릉주감의궤(1919), 장서각 소장>
<순종효황제산릉주감의궤(1926년), 장서각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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