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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체 Jul 07. 2022

달린다는 것

                         ㅡ나의 작은 삶의 기적

 언제 시작이었는지, 달리기. 생각하니 고등학교 시절 주말 아침 일찍 -그때는 일요일만 가능했을 성싶은-  집 근처 미아초등학교나 숭덕초, 조금 더 가면 국민대의 넓고 크던 운동장을 달렸다. 국민대 가는 길에 있던 정릉성당. 동그랗고 하얀 외벽에 쌓인, 지금도 그대로인 그 성당을 지나 열심히도 달렸다. 친구들 몇이랑 축구도 하고 달리기도 하며 그렇게 다녔다. 달리기는 가깝고 곁에 있던 놀이처럼 내게 얹혀있었던, 오래 잊힌 놀이요, 이사 간 친구였다.

 달리기, 그 친구가 다시 내게로 다가와 인사를 건넨 건 지극히 우연.  친한 지인들 함께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다. 로드, 그 생김새도 날렵하고 구부러진 핸들이 전문가 연하는 그런 로드 자전거를 탔다. 처음엔 잠실로 강북 남산으로 그리고는 멀리 팔당에 양수리 그리고는 양평 지나 여주역도 갔다. 여주 강천보를 향해 달리다 보면 이포보, 천서리 막국수집 가기 전, 눈에 훅 들어오는 거대한 부담, 서울 근교에서 만나는 숨 멎는 고개가 있다. 후미개 고개. 양평 개군면과 지평 이천 여주를 잇는 국토종주 자전거길 도중의 높은 고개, 후미개 고개.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태연히 혹은 뭣도 모르고 그냥 고갯길을 올랐다. 다리보다 숨이 막혀 더 이상 페달링이 불가했다. 내려서 끌고 다시 또 오르길 반복해 길고 야트막한 여주 향 후미개 고개 정상에 올랐다. '담배를 끊어야겠다'는 결심이 드는 한순간이었다. 누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자연한 흐름 속의 결의!!!!  며칠 후, 담배를 끊고, 아니 하루 안 피우고 후미개 고개를 올랐다. 훨씬 수월하여 숨쉬기도 페달링도 가뿐했다.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홀로 금연을 해냈다. 오로지 자전거와 먗 개의 후미개 고개들이 합심하여 나의 담배를 멈춰 세우고 버렸다, 나는 그들에 의해 강제로 담배와 헤어졌다, 버림 당했다. 이제 담배는 끝났다. 달리기가 들어섰다.


 자전거를 더 열심히 탔다. 담배를 안 피우니 호흡도 편하여 100킬로 200킬로 순순히 잘 탔다. 주말엔 어김없이 자전거를 탔다. 충주, 속초, 원주, 제천. 버스를 타고 가서 오거나 자전저를 타고 가서 버스로 돌아왔다. 문제는 욕심.  그놈의 속또!!! 시속 25선에서 오르내릴 뿐 30 이상으로 올라가기 만만치 않았다. 속도를 얻기 위해 운중동 국책연구원 (과거 정신문화연구원) 옆 하오고개를 5회전 10회전 왕복도 하고 실내 자전거 일명 로라도 열심히 탔다. 쉽게 30에는 달해도 더 높이 올라가거나 유지되기 어려웠다.

 자전거를 입문시킨 후배 '육탄열차(다들 멋진 닉네임들이 각자 있었다)'가 언덕을 달려보면 효과가 클 거라 했다, 지나가는 말로 간단히, 툭. 그날로 새벽 집 뒷산 불곡산을 뛰어다녔다. 종아리와 허벅지 안 쑤시는 곳이 없었다. 처음엔 일상이 어려웠다. 반복하니 점점 재밌었다. 태재고개를 뛰었다. 율동공원을 달렸다. 아침에 안되면 한밤을 달렸다. 그렇게 뭉툭하니 달리기가 내게로 왔다.

엄마의 품이 되어주는 한밤의 율동공원

 달린다는 것이 일상이 되고 습관이 되고 삶이 되었다. 어느 유명한 분의 말이라던데, '42.195km를 달리고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문제가 아니다.' 딱 그랬다. 달리기는 모든 것을 해결했다.

 요즘은 자전거보다 달리기가 잦다. 주말엔 주로 새벽, 평일엔 일 마치고 잔잔한 한밤에 달린다. 10여 킬로를 달린다. 몸 시키는 대로 20킬로를 달리거나 10킬로를 달린다. 달린다는 것이 무얼까? '본투런(born to run)'을 읽다 보면 멕시코 '코퍼 캐니언(copper canyon)'에 사는 타라우마라족의 달리기가 나온다. 일상적인 생활로서의 달리기. 네팔 에베레스트 트래킹에서 만난 이들의 일상도 산행과 등산이었듯, 타라우마라족들의 일상도 달리기다. 일터와 집과 학교와 친구네가 다 멀리 있어서 달려야만 하고 놀이도 달리기고 사냥이나 약초를 캐는 일도 다 달리기를 통해 이뤄진다. 삶이 곧 달리기인 그들이 세상 달리기에 등장하여 올림픽을, 세상 최장거리 울트라마라톤을, 보스턴 마라톤을 달리는 이야기들이 있다. 삶이 곧 놀이요, 업이 되었고 데뷔와 전성기를 만들기도 했다, 몇몇 타라우마라 사람들에게.



 

 달리기는 무엇인가.

 달리기는 기도다.

 바람이 마음에서 터져 솟아오른다. 달리다 보면 숨 막히던 일들이, 발이, 호흡이, 심장박동이 머뭇거리다 순전히 고르게 평온을 찾아내는 그 순간이 있다. 보통 3킬로나 5킬로를 넘어가면 모든 들쑥날쑥 울퉁불퉁 허둥대던 것들이 잔잔한 수평선이 되어 머리에 잔잔히 떠오르는 단 하나의 단어와 단 하나의 생각과  하나의 느낌이 있다. 그 순간에 닿으면 황홀하다.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라는 말을 들었다. 뭐라 하든 달리다 보면 머릿속이 말갛게 환해지는 순간이 있다. 그때 기도를 한다. 오직 '감사합니다'라는 어가 주종을 이루고 반복되지만, 문득문득 뇌에서 솔깃한 단어나 언어를 배출할 때가 있다. 몰캉 받아 들고 한참을 그 단어에 몰입한다. 그리고 다시 달리다 보면 그 언어를 통해 깃들고 만들어진 생각과 사고들, 혹은 '아이디어'라고 좋으이 이름 붙여줄 수도 있는, 그런 생각들이 만들어진다. 입에서 뒹굴다 뇌로 가고 발로 손으로 가슴으로 돌아다니던 나의 언어들이 고스란히 기도가 된다. 그래서 어쩔 건데? 그건 어떻게 해낼 건데? 그런다고 그게 될 성싶은가? 이런 난도질의 간섭과 충고가 끼어들지 않는 달리기의 공간 속에서의 생각과 떠오름과 뒹굴기와 매만지기가 기도다. 고스란히 생각과 생각이 하나씩 서로 말하고 듣는 순간이 달리기다.

 달리기는 무엇인가.

 달리기는 휴식이다.

 삼라만상이 말을 걸고 자기의 말을 건네고 자기의 언어를 노래하던 시간이 지나면 달리기 속에서 나는 온전히 만물 속에 홀로 선 '나'를 만난다. '나'를 본다. '나'를 듣는다. 찾아들고 다니던 걱정과 염려들 그리고 불안들이 모두 사라지는 순간, 달리다 보면 사라진 것들의 흔적 없다. 나를 위해 나를 향해 나를 통해 나를 들고 나를 달린다. 누구도 무엇도 내 안에 없다. 비워진 곳에 아직 아무것도 들지 않았다. 숨 쉬고 다리를 들어 '올리고 올리고'를 행할 뿐, 아무것도 들지 않았다, 그 빈 공간에.

 '나를 위해 살겠어.  나를 생각하며 나에게 집중하겠어.  나를 소중히 여길 테야.'
이런 다짐을 현실로 만들고 눈앞에서 이뤄지도록 하는 쉬운 길은 '달리기'.


 나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고 싶다면, 또 나에게 좀 더 솔직하고 솔깃한 말들을 하고 싶다면, 나의 얘기를 좀 더 깊고 내밀하게 듣고 싶다면 '달리기'다. 달리다 보면 들리고 보이고 들려주고 보여준다. '나는 그런 존재였구나' 싶은 모습은 달리는 도중에도 오고, 달리고 나서 샤워를 하고 홀로 깊은 밤 맥주 한 잔을 들이켜는 순간에 온다. '서머스비'의 매끈한 사과향이 온몸을 흐르다 문득 멈춰 바라보는 그 행복과 안도와 피로와 수면 욕구. 나는 주로 자정 전후를 달린다. 일이 10시경에야 끝나기 때문이다. 주말엔 새벽 운동을 하고 평일엔 늘 밤 10시나 11시에 나간다. 그런 일상들의 흐름과 틀이 사랑스럽고 완연히 몸에 젖어있다. 시간이 중하진 않다. 아무 때나 달리고 싶은 때 달린다. 달리기는 좋은 점이 많다. 짧은 운동 시간도 좋다. 운동화와 반바지 그리고 민소매 혹은 반팔 티셔츠의 간편 준비물도 좋다. 급수는 주로 달리는 도중의 화장실에서 해결하기도 하고 10여 킬로 정도는 집에서 마시고 나오면 충분하다. 달리기 찬사는 많은 곳에 넘쳐난다. 직접 맛보면 말수는 잦아드나 표정은 달리기 고무 찬양과 충성을 맹세하게 된다.

고글 마스크 민소매 티셔츠 반바지 운동화 그리고 발이 전부인 달리기 친구들



 결심을 하는 순간이 있다. 달리고 나서 결심을 하거나 결단을 내리면 좀 낫다. 20년을 꼬박 채운 나의 '업'을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하고 싶었다. 두 달을 달리며 기도하고 고민하고 불안과 희망 사이를 오갔다. 그만두었다. 1년이 지난 지금 후회가 찾아와도 금세 편안해진다. 오래오래 고민한 결과라기보다는 달리며 깊이깊이 나와 대화하고 곱절로 함께 생각한 덕분이었다. 모든 결정과 선택은 두렵고 불안하거나 벅차고 감동적이다. 다만, 그 간격과 깊이가 다를 뿐이다. 달리며 또 달리며 돌아보고 되뇌고 톺아보다 맞이한 끝은 낫다. 그리하여 이 또한 '달리기' 덕분이다.

 달릴 수 있다면 오래 자주 달린다. 머뭇거리지 않고 나가서 달린다. 매일 혹은 주 5회 정도 달린다. 삶이, 생生이 내게 무얼 말하고 있는지 궁금하다면 달린다. 그리하여 난 살아있다. 혹시 당신의, 그대의 삶이 지루하거나 무겁거나 벅차거나 죽도록 환멸에 다가서 있다면 '달려보세요'. 한 발 두 발 1킬로 3킬로. 삶이 온전히 다른 옷으로 그대 앞에 서서 말 걸어올 거예요.

달린다. 그리하여 난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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