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측을 따라 찬찬히 달린다. 퇴근 런이 늘 그렇듯 웜업을 위해 시작은 느리고 여유롭다. 10시면 학생들이 학원 마치고 쏟아져 나오는 시간이라 도로엔 사람들이 꽤 많다. 3백 미터쯤 달렸을까. 내 앞으로 불쑥 여학생이 나타났다. 손에 핸드폰을 들고 남친과 얘기를 나누며 걸어왔다. 눈은 어디에 두었을까. 난 속도를 더 낮추고 조심해서 빗겨 지나가려던 중이었다. 나를 발견한 여학생의 목소리는 작고 빠르고 날카로웠다.
"아, 씨발, 뭐야?" 난 그냥 계속 달렸다. 내리막이라 속도가 올랐다. 들었던 소리, 한 문장, '아씨발뭐야?'가 저 멀리 쪼그라들고 있었다.
#2
탄천을 들어서기 직전, 파크타운에서 중앙공원을 잇는 육교가 있다. 경사로를 올라 계단을 내려가면 되는 길이다. 매일 다니던 길을 오늘도 쪼르륵 올라가는 중이었다.
골든 리트리버인지 대형견이 컹컹 컹컹 짖으며 나를 향했다. 속도를 붙여 개는 내려오고 난 난간 쪽에 붙었다. 젊은 아빠가 놀라 목줄을 당기다 뒤로 벌러덩 엉덩방아 찧으며 넘어졌다. 개는 쇠 목줄이 강하게 견인해서인지 문득 섰다. 개 주인 젊은 아빠가 미안하다 인사했다. 오른손을 흔들며 괜찮다고 말하고 살짝 웃었다.
두개의 장면이 발생한 곳이 늘 다니던 길에 놓여있다.
#1을 생각한다
욕설은 입에 착 감기고 습관이 되어 아무 때나 튀어나온다. 절제와 제어를 넘었다. 또래들이 누구나 입에 달고 다니니 그니도 그랬나 보다. 요즘 아이들 중에도 대화를 거반 욕으로 하는 아이들이 있다. 그럴 수 있다. 나도 하는 욕인데 그니도 '불쑥' 어쩔 도리 없었을게다.
#2에 대해 살핀다
개가 날 향해 달려갈 줄은 어찌 가늠할까? 누구도 쉬이 알 수 없는 것. 더구나 넘어져 개의 목줄은 당겨졌고 그니의 얼굴엔 쪽팔림이 가득했다. 거기에 대고 할 말이 무에 있겠는가. 고관절은 괜찮은지 손목을 삐끗하진 않았는지 속으로 몇 마디 스쳐갔다.
길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고 발은 길에 닿아 있다.
#'아씨발'에 대한 무감각
평상의 시절엔 그냥 넘기기가 녹록하지 않았을 일이다. 욕하는 학생이나 개를 느슨하게 묶고 다녀 지나는 행인을 향해 돌진하는 개 주인에 대해 뭐라도 한 마디 했을 것이다. 귀찮으면 기분은 상했을 텐데 그런 감정도 일지 않았다. 여유롭게 지나갔다. 아무런 감정이 일지 않았다는 걸 한참 달리다 눈치챘다.
#모리 할아버지와 춤과 여유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이 생각났다. 모리 할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파서 침대에 누운 병든 노인의 모습이 아니라 온전히 홀로 음악에 취해 혼자 막춤을 추는 할아버지가 떠올랐다. '메멘토 모리'와 함께.
"우리 모두가 찾는 게 그거잖아. 죽어간다는 생각과 화해하는 것. 결국 우리가 궁극적으로 죽어가면서 평화로울 수 있다면, 마침내 진짜 어려운 것을 할 수 있겠지." "그게 뭔데요?" "살아가는 것과 화해하는 일."
오래전 블로그에 쓴 독후감을 읽었다. 살아가는 것과 화해하는 일은 내가 죽는다는 것을 인식하고 인정하고 지금 삶에 집중과 너그러움을 갖는 것이다. 죽음이 불쑥 들어온 여름이 간다. 무기력에서 오는 무료한 여유가 아니길 바란다. 오늘도 여유로워진 마음을 본다. 삶은 죽음 앞에 서야 정의가 된다. 더 잘 살아있게 된다. 모리 할아버지의 따스한 눈길이 문득 그립다. '잘 살아가야지, 그게 진짜 멋진 죽음을 맞는 비결이지.' 하실 것만 같다. 모리 할아버지 보고 싶다. 찬찬히 보듬어주던, 삶에 대한 아득한 사랑 알려주시던 분. 다들 멀리 있다.살아가다 보면 닿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