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나를 바스러뜨리는지 아는 이 많지 않다. 지나고 나서 돌아보면 보이거나 알거나 느끼는 것들. '오늘은 전국이 대체로 맑겠습니다.'라는 이 한 줄의 작은 문장도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순간은 명쾌하고 정확하다. 아나운서는 단 몇 초, 단 한 호흡도 긴장을 놓지 않고 끝까지 정확히, 명료하게 발음한다. 단 한 글자라도 흐트러지면 치명적 자책에 빠질 것이다. 일단, 틀려도 혹은 실수하여도 한번 해보는 것이다. 이것이 '탈각(脫殼)'의 처음이다. 다르다는 것. 달라진다는 것.
매미가 자주 껍질을 벗어놓는다. 작은 텃밭에 벌써 세 번이다. 깻잎 파리 위에 고춧잎 위에 그리고 돼지감자 넓은 한여름의 잎 위에 덜컥 껍질을 내려놓았다. 생생하고 뚜렷하고 투명하여 투과한 햇빛이 매미의 몸을 만드는 중인 것처럼.
여기까지 써놓고 며칠 두고 볼 요량이었다. 살면서 끊어내지 못한 것들, 벗어나지 못한 것들에 대해 그리고 마침내 탈각에 성공한 얘기들 쓸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며칠, 몇 주 사이에 엄마가 돌아가셨다. 순식간에 사흘 만에. 응급실 들어가신 지 이틀 만에.
탈각(脫殼). 벗어버리다. 완전히 벗어나다.
엄마의 저 세상. 나비가 번데기였던 날들, 고치 속에서의 날들을 기억할까. 나비가 고치 속에서 이제 여기가 끝이구나 할 때 하나님은 나비가 되게 하신다는 금언을 들은 적 있다. 엄마는 간단하고 엄숙하고 명쾌하게 한 방에 사라지셨다. 손수 준비해둔 수의를 입고 순순히 입을 틀어막으신 채 꼿꼿이 한 줌이 되어 묻혔다. 이 몸을 벗고 어딘가 저 세상으로 가셨다. '왜'라고라도 묻고 싶은 아가가 되었었다. 한참 동안.
벗어버린 무게와 거추장들을 두고 혹은 남은 자식들과 그들의 슬픔과 눈물을 두고 후회와 아쉬움을 지니고 날아가다 되돌아올 일 없다. 이것이 온전한 탈각이다. 담배로부터, 부질없는 인연들로부터, 관계들로부터 벗어난 알맹이들. 껍질이 곱고 투명하고 빛날지언정 돌아볼 일 없다. 죽음은 그런 것이다. 인터스텔라를 다시 본다. 말없이 혼자 껍질들을 바라본다.
엄마는 저 세상 어딘가에서 도저히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일과 과정 속에 있을 테지. 하나님은 나의 상상과 추리에 갇힌 분 아니시니. 오로지 남은 껍질을 놓고 마음 쓰고 돌아본다. 엄마의 시들을 읽고 돌아본다. 오래된 엄마의 사진들을 읽는다. 무엇이 남아있는가. 그리움은 그리움대로 슬픔은 슬픔대로 남는다. 나비가 되어 꽃잎 풀잎 사이 날아가는 길에 고치 나뭇가지 속에 매달려 흔들린다. 매미 갈참나무 위에서 미친 아귀마냥 쉼 없이 소리를 지른다. 그들이 벗어놓은 껍질들이 바람에 날려 깻잎 파리 고춧잎 새 놓인 것을 기억할까.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고 엄마의 '아들?' 하는 끝이 살짝 올라가는 그 예의 음성이 다가온다. 어쩌랴, 나비는 고치를 모르고 매미는 놓인 껍질을 알지 못하나니. 남은 자들의 슬픔은 돌고도는 작은 바퀴. 그리하여 탈각에 이른 저세상의 엄마를 그리워할 뿐, 다가갈 수도 불러낼 수도 없다.
오직 나의 작고 작은 탈각의 날들을 반복하다 마지막 크고 놀라운 그 진짜배기 탈각의 순간을 기다릴 뿐.그래도 그래도 엄마가 보고 싶다. 언젠가 그칠 것인가. 삼남에 내리던 눈이 그치듯 이 그리움들 그치길 빌어보는 깊은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