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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그리고 동물원

단편소설

경기도의 작은 도시. 그녀는 교사 임용을 받아 그곳에서 새 삶을 시작했다.

학교와 가까운 아파트, 오래된 가구가 몇 개 들어찬 투룸. 평범하지만, 새로 산 베개와 이불에서 희미하게 나는 세탁소 냄새가 신선했다.


나는 토요일 저녁마다 그 집을 찾았다. 주말이면 시작되는 ‘반(半) 동거’. 우리는 마치 오래 준비된 부부처럼 장을 보고, 부엌에서 함께 칼과 도마를 부딪쳤다. 소박한 국 한 그릇에도 그녀는 꼭 "맛있지?" 하고 되묻곤 했다. 그리고 내가 "네가 해서 그래"라고 대답하면, 그녀는 꼭 아이처럼 웃었다.


"우리 이렇게 사는 거, 좀 재밌지 않아?"
"응, 신혼집 같아."
"신혼은 아니지. 우리는 그냥… 반쯤."
"반쯤이라도 괜찮아. 난 지금이 좋으니까."

우리는 그 반쯤의 행복에 안주했다. 하지만 반쯤의 관계는 늘 균열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동물원’을 무척 좋아했다. CD를 사서 내게 건네며 말했다.
“이 노래 들어봐. 가사가 꼭 네 얘기 같아.”
“내 얘기?”
“응. 넌 항상 뭔가 버티고 사는 느낌이야. 가끔은 힘든 거 숨기잖아.”
“사람이 다 그렇지 뭐.”
“그래도 음악이 있으면 좀 버틸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대답 대신 웃으며 CD를 틀었다. 낡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담백했고, 가을 저녁과 어울렸다. 그때는 몰랐다. 그 목소리가 언젠가 우리 사이를 가를 줄은.


가을 한복판, 그녀가 제안했다.
“가평에서 동물원 콘서트를 한대. 같이 갈래?”
“가평까지? 멀잖아.”
“내가 운전할게. 티켓에는 밥도 포함되어 있고 맥주도 무제한이래.”
“공짜 맥주라… 그건 좀 끌리네.”
“술 생각밖에 없어?”
“사람은 다 자기 좋아하는 걸로 끌리는 거지. 넌 노래, 난 술.”

그녀는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그래도 좋아. 너랑 같이 가면 다 괜찮아.”


차창 밖으로 단풍이 번졌다. 그녀는 핸들을 잡으며 종종 노래를 흥얼거렸다. 목소리는 살짝 떨렸고, 눈빛은 들떠 있었다.
“너 오늘 왜 이렇게 신나 보여?”
“나 고등학교 때부터 좋아하던 그룹이야. 그때는 콘서트 같은 건 상상도 못 했거든. 지금 이렇게 보러 가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아.”
“고등학교 때라… 사춘기 시절 첫사랑 같은 건가?”
“비슷해. 첫사랑은 아니지만, 내 청춘의 배경음 같은 거.”


나는 괜히 씁쓸해졌다. 그녀의 말속에서 내가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그녀와 ‘동물원’ 사이에 흐르는 어떤 강렬한 연결, 나는 그저 동승자였다.


공연장 주변은 콘서트를 보러 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우린 산채비빔밥을 먹으며 맥주를 마셨다. 나는 컵을 연거푸 들이켰다.
“또 마셔?” 그녀가 물었다.
“왜? 공짜라는데 아깝잖아.”
“술이 아깝니, 나랑 있는 시간이 아깝니?”
“그런 말이 어딨 어?”
“진심으로 대답해.”
“술은 아깝지만, 너랑 있는 시간이 아까울 리 없잖아.”
“농담처럼 말하지 마.”

그녀의 눈빛이 순간 굳어졌다. 나는 웃으며 컵을 비웠지만, 그 눈빛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공연이 시작되자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환호했다. 팔을 흔들고, 노래를 따라 불렀다. 나는 맥주를 들고 자리와 매점 사이를 오갔다. 그때 그녀가 소리쳤다.
“술 좀 그만 마셔! 냄새 나!”
“왜? 공짜인데 뭐 어때.”
“너 말고 이렇게 마시는 사람 없어. 창피해.”

나는 그 말을 들은 순간, 음악이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무대 위의 멜로디는 공허하게 흩어졌고, 내 귀에는 단지 ‘창피하다’는 그녀의 목소리만 남았다.


공연이 끝나고 팬들이 무대로 몰려가 사인을 받았다.
“가서 받아.” 내가 말했다.
“싫어. 부끄러워.”
“이런 기회 다시없어. 빨리 가.”
“아니야. 그냥 보고만 있을래.”
“너 정말 답답하다.”

나는 그녀의 손을 억지로 잡아끌었다. 멤버 앞에 선 순간, 그녀는 얼굴이 환해졌다. 그들과 포옹하고, 사인을 받으며, 마치 오랜 꿈을 이룬 듯 눈이 반짝였다.
나는 그 순간 내가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그녀의 기쁨은 내 몫이 아니었다.


돌아오는 길, 그녀는 차창을 열고 공연장을 빠져나오는 사람들에게 말을 걸었다.
“태워드려요?”
“뭐 하는 거야?” 내가 낮게 물었다.
“같이 왔으니까, 도와주면 좋잖아.”
“하지 마.”
“왜 그래? 좋은 일인데.”

결국 그녀는 몇몇 청춘들을 태워 버스정류장에 내려줬다. 차 안에서 낯선 웃음소리가 번졌다. 나는 고개를 젖히고 눈을 감았다. 자는 척을 했다.


도착했을 때 그녀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자는 척하는 거 알아. 다 왔어. 내려.”

나는 말없이 차에서 내려, 그녀 집에서 내 짐을 싸고 곧장 내 차로 향했다. 밤하늘엔 별이 총총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날 이후 우리는 다시 만나지 않았다.
나는 오래 생각했다. 우리가 끝난 이유는 무엇일까?
질투 때문이었을까?
동거로 인해 사라진 신비감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녀의 무심한 말 몇 마디가 나를 하찮게 만들었기 때문이었을까?

맑던 가을날의 동물원 콘서트는 내게는 불현듯 찾아온 이별의 장면이 되었다.





모든 걸 다 가질 순 없어(동물원)


한 남자를 알고 있어

그가 만졌던 모든 것에 깊은 상처를 준

또 마치 필연인 듯 그 역시 상처를 받은

혼자만의 삶으로 황폐하게 남겨진


나를 위해 걱정하지 마

나를 위로하려 하지 마

그는 이렇게 말해

변명은 언제나 허위에 지나지 않을 뿐

내가 원했기에 이 길로 들어선 것이라고


아침이면 출근을 해

그건 어려운 일이 아냐

그저 습관처럼

변함없는 하루에 만족하며 살 수 있어

단지 밤이면 예전보다 많이 마실 뿐


나는 예전의 내가 아냐

나를 비난하려 하지 마

그는 이렇게 말해

난 내 최선을 다해 내 삶을 지키려 할 뿐

지난날의 척도로 판단할 순 없다고

그는 이렇게 말해


모든 걸 다 가질 순 없어

서로에게 주어진 작은 몫을 수긍하며 사는 거야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는 더 많은 것들을 원하게 되지만

좀 더 적은 것들을 더 어렵게 더 힘들게 얻게 되는 거야


한 여자를 알고 있어

깨어진 꿈의 조각들에 손을 베인

이젠 손에 쥘 수 있는 것만을 믿게 된

그걸 놓치지 않는 세상의 법을 깨달은


나는 예전의 내가 아냐

나를 비난하려 하지 마

그는 이렇게 말해

난 내 최선을 다해 내 삶을 지키려 할 뿐

지난날의 척도로 판단할 순 없다고

그는 이렇게 말해


모든 걸 다 가질 순 없어

서로에게 주어진 작은 몫을 수긍하며 사는 거야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는 더 많은 것들을 원하게 되지만

좀 더 적은 것들을 더 어렵게 더 힘들게 얻게 되는 거야


좀 더 적은 것들을 더 어렵게 더 힘들게 얻게 되는 거야



https://youtu.be/cXd9w_6ut-Y?si=d5xp1ZYfRBtvHlf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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