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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다 이루어졌다!

단편 소설

어느덧 쉰을 넘겼다.
인생의 절반 이상을 버텼고, 남은 절반은 두려웠다.

어릴 적부터 가난은 숨 쉬듯 당연한 것이었다. 무더운 여름, 차가운 밥에 간장 한 숟가락이면 하루를 버텼다.

그때 다짐했다.


'공부만이 살 길이다.'


그 다짐 하나로 청춘을 태워 명문대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늘 가난의 냄새를 숨기며 살았다.
친구들이 MT를 갈 때, 나는 과외를 뛰었다.

‘나는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그것만을 믿고 달렸다.


세월이 흘러, 나는 아이 둘을 둔 가장이 되었다.

아내는 차분했지만 눈빛엔 늘 “괜찮겠지?”라는 불안이 비쳤다.
아이들은 점점 커갔고, 돈은 따라가지 않았다.

그래서 더 열심히 일했다. 주말에도, 명절에도, 쉬지 않았다.
내 삶에는 오직 일만 있었다.


밤이 되면 나는 집 근처 숲길을 걸었다. 그것이 유일한 탈출이었다.
걸으면서 늘 상상했다.


'만약 수천억이 생긴다면…'


머릿속은 갑자기 화려한 영화처럼 변했다.

강남에 수십억짜리 아파트를 사리라. 딸 둘이 대학에 들어가면 그곳에서 통학하게 하고, 아내는 여유롭게 지내게 하리라.
지금 사는 집은 서울까지 너무 멀었다.


또 상상했다.

그리고 아주 큰 전기차를 하나 사서 전국을 돌아다니는 거야. 캠핑하고, 차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완전히 자유로운 삶이지.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아, 그리고 동해안에 바다가 보이는 아파트를 하나 사야지. 언제든 가서 며칠 쉬다 오면 되잖아. 완벽하군.

그렇게 혼잣말을 하며 걸었다. 그 상상만이 나를 버티게 하는 유일한 낙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그 상상이 끝난 자리에 이상한 허무가 스며들었다.
나는 걸음을 멈췄다. 나무 사이로 바람이 불어왔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근데… 내가 그걸 다 가져서 얻고 싶은 게, 뭐지?”


그 말이 공기 속에 흩어졌다. 숲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내 안쪽 어딘가가 천천히 흔들렸다.
그때 처음으로 내 안이 고요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데, 이상하게 풍요로웠다.
마치 세상이 나를 멈춰 세워 “이제 그만 뛰어도 된다”고 속삭이는 듯했다.


그날 이후, 나는 조금씩 현실을 바꾸기 시작했다.
여전히 일했지만, 일을 ‘벌이’가 아니라 ‘구조’로 보기 시작했다.
오프라인 강의를 줄이고, 인터넷 플랫폼으로 옮겼다. 그러면 어디서든 일할 수 있었다.


다시 계산기를 두드렸다.
집값, 대출, 저축, 연금, 주식.
숫자를 다 더하고 빼보니, 놀랍게도 나는 이미 ‘자유롭게 살아도 되는 사람’이었다.


그날 저녁, 아내에게 말했다.


“서울에 굳이 집을 사지 않아도 될 것 같아. 아이들이 대학 가도 서울 근교면 충분하지 않겠어?”


아내는 놀란 눈으로 물었다.


“당신, 강남 아파트 사는 게 평생 꿈이었잖아.”


나는 웃었다.


“그거 없어도 돼. 우리가 예전에 분양받은 근교 집이면 통학도 되고, 공기도 좋고, 삶이 훨씬 여유로워.”


몇 년 전, 서울에 맞닿은 지역의 40평대 아파트를 분양받았다. 주변은 산과 공원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한강 공원도 도보로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직장과 아이들 학교 문제로 그곳을 임대주고, 먼 곳에서 살고 있었다.
이제 아이들이 대학에 가면 그곳으로 이사하면 됐다. 더군다나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온라인 플랫폼으로 옮기고 있으니 어디서든 일할 수 있었다.


“그래도 당신, 캠핑카 산다더니?”


아내가 물었다. 나는 창밖을 바라보며 웃었다.


“지금 타는 전기차로도 충분해. 조금 좁긴 해도 주말에 나가면 차박도 가능하잖아.”

“그럼… 동해안 아파트는?”

“그건 숙소 빌리면 되지. 바다가 보이는 숙소들이 많더라고. 그리고 지금은 인터넷만 되면 어디서든 일할 수 있어. 평일에 사람들 없을 때 싸게 숙소를 잡고, 거기서 바다를 보며 일하면 돼. 꼭 돈이 아주 많아야 가능한 게 아니더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일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면, 남들 안 가는 평일에 여행하며 사는 것도 가능했어.”


아내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다시 숲길을 걸었다. 바람이 불고, 나뭇잎이 부딪히며 작은 파도처럼 출렁였다.
나지막이 속삭였다.


“이미 다 이루어졌다.”


그 말이 이상할 만큼 진하게 가슴에 박혔다.
이미 다 가졌던 것이다.
아내의 웃음, 아이들의 목소리, 그리고 매일 새벽의 고요한 시간.


그날 밤, 가족과 식탁에 앉아 저녁을 먹었다.

딸이 물었다.


“아빠, 오늘은 왜 이렇게 기분이 좋아 보여?”

“비밀이야.”

“복권이라도 당첨됐어?”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이미 다 이루어졌다는 걸 알았거든.”


식탁 위엔 오랜만에 웃음이 흘렀다. 그 웃음을 들으며 생각했다.

세상은 변하지 않았지만, 나의 세상은 완전히 달라졌다.


나는 여전히 같은 집에 살았고, 같은 차를 몰았고, 같은 일을 했다.
하지만 더 이상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내 삶은 이미 완성되어 있었으니까.


나는 그렇게, 모든 것을 이룬 사람의 얼굴로 숲길을 천천히 걸었다.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그 바람이 나를 지나며 말했다.


“그래, 이미 다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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