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불은 꺼졌지만

사무실 안 공기는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다. 커피 냄새와 함께 긴장된 숨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회의실 유리창 밖으로는 따뜻한 햇살이 스며들었지만, 재형의 어깨는 한없이 무거웠다.

“오 과장.”
부장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40 다 돼서 아직 과장이면, 뭐가 문제인지 생각 좀 해봐야 되는 거 아니야?”

회의실 안은 조용해졌다. 누군가 키보드 두드리던 손을 멈췄고, 벽시계 초침 소리만 들렸다.
재형은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깨물었다.

“성과가 없어. 영업직이면 숫자로 말해야 하는데, 오 과장은 늘 계획만 말해. 계획 말고 실적을 보여줘라고!”

“죄송합니다. 이번 분기에는—꼭”
“이번 분기, 다음 분기… 그 말이 몇 번째야?”
부장이 재형의 보고서를 책상 위에 던졌다.
“당신 동기들은 다 차장 됐어. 언제까지 자리만 지키고 버틸 거야?”

재형은 고개를 숙였다.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정적 속에서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비웃는 것 같았다.


그날 오후, 인사팀에서 ‘조정 면담’ 통보가 왔다.

감봉. 그리고 사실상의 퇴사 압력.


퇴근길, 한강 다리 위에서 그는 무심히 창밖을 바라봤다. 강물은 까맣게 일렁이며, 거대한 괴물처럼 꿈틀거렸다. 그 어둠이 자신을 삼키려 드는 듯해, 잠시 숨이 멎었다. 그때 라디오에서 동물원의 노래가 잔잔히 흘렀다.

“숨 가쁜 생활 속에
태엽이 감긴 장난감처럼
무감한 발걸음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집에 도착했을 때,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내는 식탁 위에서 고등어를 굽고 있었다. 그 냄새가 이상하게 미안했다.

“여보, 오늘 회사에서…”
그는 말을 멈추고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회사를 그만둬야 할 것 같아.”

아내가 프라이팬을 내려놓았다.
“뭐라고?”
“계속 버텨도 답이 안 나와. 성과도 없고, 감봉까지 됐어.”

둘 사이는 침묵이 흘렀다. 지글거리는 고등어 소리만 들렸다.

“그럼 당신 뭐 할 건데?”
“음식점이라도 해보면 어떨까? 요즘 고깃집 잘 되잖아.”
“애들이 지금 초등학생, 중학생이야. 지금이 제일 돈 많이 들어갈 때라고. 당신, 장사 한 번이라도 해봤어?”

재형은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서, ‘이대로는 못 버텨’라는 목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몇 달 뒤, 그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회사를 퇴사했고, 퇴직금으로 작은 고깃집을 냈다. 타이거 바이크 회원들이 개업식날 찾아와 재형을 축하했다. 유리창 너머로 붉은 간판이 빛났고, 지글거리는 불판 위에서 고기가 익는 소리와 웃음소리가 뒤섞였다. 재형의 얼굴에도 오랜만에 웃음이 번졌다.

'이제 나도 내 힘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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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저녁, 라이딩을 마친 타바 회원들이 단체로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헬멧을 벗은 얼굴마다 햇빛에 그을린 자국이 선명했다.
“여기, 삼겹살 6인분이요!”
“재형아, 여기 고기 진짜 맛있다. 너도 자리 잡았으면 라이딩 같이 해야지.”

회원들의 환호에 재형은 바쁘게 움직였다. 손끝에 밴 기름 냄새와 불판의 뜨거운 열기가 이상하게 싫지 않았다. 하루 종일 연기 속에 있었지만, 그 냄새 속엔 ‘이제는 나도 내 힘으로 해낼 수 있겠다’는 믿음이 섞여 있었다.


“여기 소주 한 병 더요!”
“재형이 사장이라니까 이렇게 든든할 수가 없네.”

영실이 자리에서 일어나 소주잔을 들었다.
“우리 재형이의 새로운 출발을 축하합시다. 페달 대신 불판을 달구는 재형이에게!”
환호와 박수가 터졌다. 잔이 부딪칠 때마다, 재형의 가슴 안에서는 뜨거운 자신감이 올라왔다.


그 자리에 주성도 있었다. 그는 늘 그랬듯, 사람들의 중심에 앉아 있었다.

새 옷처럼 번쩍이는 시계, 유난히 큰 목소리, 그리고 은근한 미소.
그가 잔을 들어 재형을 향했다.

“우리 재형이~, 드디어 사장이 됐네.”
말끝에는 축하와는 다른 비아냥이 섞여 있었다.
“어떻게, 이런 데 자릴 잘 잡았어? 여기 상권 진짜 좋은데. 이 근처에 이런 고깃집이 별로 없잖아.”

“운이 좋았어요.”
재형은 주성의 칭찬에 머쓱하게 웃었다. 하지만 주성은 재형의 대답에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운이라… 참 겸손하네. 근데 장사는 운보다 감이야. 나도 요즘 다른 점포 하나 내볼까 생각 중이거든.”

그의 말에 회원들 사이로 잠깐 정적이 흘렀다. 영실이 주성에게 술을 권하며 말했다.
“에이, 총무님은 이미 잘 나가잖아요. 벌써 점포를 몇 개씩이나 운영하시면서 욕심도 많으셔.”
주성은 웃으며 잔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 웃음 속엔 비열한 무언가가 숨겨져 있었다.

밤이 깊어지자 사람들은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지막 손님을 배웅하고 돌아온 재형은 가게 문을 닫으며 창밖을 내다봤다.


불빛이 도로 위로 흩어지고, 그 불빛 위로 주성의 말이 아른거렸다.

'상권 좋다… 감이 온다…'

주성의 그 말이 마치 예언처럼 귓가에 남았다.
하지만 그때의 재형은 몰랐다. 그 불빛 아래, 그의 가게를 삼킬 더 큰 불이 서서히 번지고 있다는 것을.


몇 달 뒤, 바로 맞은편에 새 간판이 걸렸다.
‘타이거 고깃집’
운영자는 동호회 총무 주성이었다. 그는 이미 여러 고깃집을 운영하며 돈 냄새를 잘 맡는 사람이었다.

주성의 가게는 대형 간판, 무료 반찬, 반값 이벤트로 사람들을 끌어모았다. 주말마다 주성은 동호회 단톡방에 홍보글을 올렸다.
“이번 주 회식은 우리 가게에서! 특별 회원가로 모심!”


재형의 가게 앞 불빛은 점점 어두워졌다. 한때 북적이던 테이블은 하나둘 비었고, 그가 믿었던 동호회 사람들도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았다.


어느 날 밤, 재형은 가게 문을 닫고 불 꺼진 거리로 나왔다. 맞은편 주성의 간판이 눈부시게 빛났다.
화려한 조명 아래,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왔고, 그 불빛이 싫어 눈을 감아도 잔상이 남았다.

“세상은 참 단순한 것 같아.”
재형은 체념하듯 중얼거렸다.
“어디든 강한 놈만 남고, 약한 놈은 죽어.”


그 후로도 재형은 끝까지 버텼다. 장사가 안 돼도 매일 불을 켰고, 의자를 닦고, 고기를 준비했다. 그러나 점심시간에도, 저녁시간에도, 손님은 오지 않았다. 냉장고 속 고기는 하루가 다르게 색이 변했고, 재형의 표정도 함께 바래갔다. 어느 날 아내가 찾아와 말했다.

“이젠 접자, 빚만 늘어. 이러다 우리 정말 다 죽어.”

재형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손에 들고 있던 집게를 천천히 내려놓았다.


고깃집 천장에 매달린 형광등 불빛이 깜빡였다. 그 흔들림이 마치 자신의 심경 같았다.

며칠 뒤, 그는 마지막으로 불판을 닦았다. 테이블 위의 양념통을 정리하고, 의자를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문을 닫고 나오자, 간판 불빛이 꺼졌다. 붉은 네온 글자는 이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재형은 문득 미소를 띠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내 힘으로 할 때까지 했어. 내 인생 끝날 때까지 끝난 건 아니야.”

그가 손에 쥔 건 돈이 아니라, 지난 몇 달간의 땀과 후회, 그리고 조용한 해방감이었다.

재형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천천히 걸었다. 한강 쪽으로, 바람이 부는 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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