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지 말고, 이것을 해라!
이런 현상은 왜 벌어지는 것일까요?
배우 하정우에 대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하정우의 대학 후배가 하정우를 봤는데,
"그는 연기나 연예계 데뷔에 관심도 없고 군대 제대 후에 학생회실에서 기타 치고 노래나 부르고 술만 먹는 선배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뛰어난 연기자가 되어 있었다."
왜 하정우는 연기에 대해 별로 신경 쓰지 않고 노력하지 않은 것 같은데, 뛰어난 배우가 됐을까요?
서울대를 졸업한 교수 출신 부모들이나 공부를 많이 한 부모들 중에 보면 자녀 교육에 대해 그리 신경 쓰지 않는 듯, 무관심한 경우가 많이 보입니다. 그런데 자녀가 공부로 성공하는 케이스가 있어요.
이런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 원하고 바라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했을까요?
우리가 무엇을 원하고 바란다는 것은 그것이 결핍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공부를 못하거나 앞으로 공부를 못할 것이라는 불안함에 우리는 자녀가 공부를 잘하기를 바랍니다.
그에 비해 어떤 부모들은 자녀가 공부를 잘할 것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무의식에서 믿기 때문에 그들은 자녀가 공부를 잘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당연히 공부를 잘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바라고 원하는 것보다, 무의식 깊숙이 믿어야 합니다. 그런 믿음이 있을 때 자녀는 부모의 믿음에 강한 신뢰와 자신감을 갖습니다. 지금 당장 자녀가 공부를 잘하지 않아도 앞으로 잘할 것이라고 굳게 믿게 되면, 조바심보다는 여유 있는 사랑과 감사함이 생겨납니다.
꼭 자녀 문제가 아니라도 생각해 보면 우리는 굳게 믿는 것이 하나씩은 있을 거예요. 그러면 그것은 당연히 될 거라고 알기 때문에 여유 있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불안함이 없는 것이죠. 이런 믿음이 있어야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내가 뭔가를 원한다는 것은 결핍을 의미하고, 그런 결핍의 에너지를 외치고 있기에 결핍이 계속 유지됩니다. 자녀가 공부를 잘하기를 원한다는 것은 못 할 것 같고, 못 한다는 상태를 내가 인정한다는 것이 되고, 그로 인해 자녀는 계속 공부를 못하게 됩니다. 즉, 내가 믿는 데로 자녀가 되는 것이죠.
자녀 교육에 대한 이런 믿음은 본인이 공부를 잘한 경험이 있다면 쉽게 가질 수 있지만-왜냐하면 공부하는 것이 어렵지 않고 누구나 노력하면 될 것을 알기에 내 자녀도 충분히 잘 해낼 수 있다-그렇지 않은 경우는 가지기가 힘듭니다.
이런 믿음을 만들기 위해서 가장 좋은 것은 작은 성공이지만 그전에는 무의식을 바꾸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무의식은 단순하게 반복적인 암시에 의해 변화가 됩니다. 나의 잠재의식이 나의 행동을 결정하지만, 내가 무의식을 통제해서 무의식이 나의 행동을 도와주도록 만들 수 있는 것이죠.
반복적인 암시에는
반복적인 구절 듣기, 반복적으로 말하기, 반복적인 상상하기, 상상을 구체화하는 곳을 가서 보고, 만지고, 체첨하기, 반복적인 쓰기 등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자주 하는 기도도 확언과 감사함을 통해 믿음을 강화시키는 행동입니다. 확언과 감사함은 결핍이 아닌 이미 이루어졌음을 무의식에 만들어줍니다.
내 아이가 공부를 열심히 함에 감사합니다. 내 아이는 공부를 잘한다.
이런 말들은 결핍이 아닌 충족을 뜻하므로 충족의 메시지로 인해 내가 아이를 믿게 하고, 아이는 부모의 강력한 신뢰로 자기 공부에 대해 믿음을 갖게 됩니다.
물론 이것은 공부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도 적용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