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과 결핍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다른 삶으로 이동하는가?
학부모 상담을 하다 보면 비슷한 말을 정말 많이 듣는다.
“머리로는 괜찮다고 생각하려고 하는데, 마음이 말을 안 들어요.”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걸 알면서도 불안이 멈추질 않아요.”
이 말 속에는 공통된 전제가 하나 있다.
지금 이 감정이 ‘나’라는 전제.
하지만 사실 대부분의 부모들은 ‘나’로 살고 있는 게 아니라 특정한 삶의 모드에서 자동 반응하며 살고 있다.
중2 아이를 둔 한 부모의 이야기다. 아이가 수학 시험을 망쳐왔다. 점수를 보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진다.
그 다음부터 생각은 이상할 정도로 빨라진다.
“이 성적으로 고등학교 가면 어떡하지?”
“이러다 고등학교 가서 완전히 무너지는 거 아니야?”
“지금 안 잡으면 끝나는 거 아니야?”
아이는 아직 방에서 쉬고 있는데 부모의 감정은 이미 3년 뒤 입시 실패까지 가 있다.
이게 불안 모드다.
불안 모드에서는 지금의 아이를 보지 않는다. 미래의 최악의 시나리오를 현재처럼 산다.
그래서 말이 이렇게 나온다.
“너 이대로 가면 큰일 나는 거 알아?”
“지금 이 점수가 문제가 아닌 거야.”
아이 입장에서는 시험 하나 망쳤을 뿐인데 존재 전체가 부정당하는 느낌을 받는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자. 왜 이렇게까지 불안해질까?
가만히 들여다보면 시험 점수 자체보다 다른 감정이 숨어 있다.
“내가 부모로서 뭘 잘못한 건가?”
“남들만큼 못 해주고 있는 건 아닐까?”
“이 정도로는 부족한 부모 아닐까?”
이 순간, 부모는 아이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증명하려는 싸움을 하고 있다.
이게 결핍 모드다.
결핍 모드에 들어가면 아이의 상태는 곧 부모 자신의 가치 평가가 된다.
그래서 아이에게 필요 이상으로 개입하고, 말이 많아지고, 통제가 시작된다.
불안과 결핍이 쌓이면 곧 생존 모드로 넘어간다.
이때는 대화가 아니다. 전쟁이다.
목소리가 커지고
말이 짧아지고
아이의 표정은 굳고
관계는 경직된다
부모의 내면에서는 이런 신호가 켜진다.
“지금 뭔가 하지 않으면 위험하다.”
하지만 아이에게 남는 건 공부 의지가 아니라 관계의 피로감이다.
이 시점에서 대부분의 부모는 더 노력하거나, 더 정보를 찾거나, 더 강하게 밀어붙인다.
하지만 방향은 정반대다.
관찰자 모드는 “괜찮아져야지”라고 다짐하는 상태가 아니다.
아주 사소한 문장 하나에서 시작된다.
“지금 내가 많이 불안하구나.”
이 문장은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 아이의 점수를 바꾸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 한 문장이 부모를 감정 한가운데서 끌어낸다. 조금 더 깊어지면 이런 인식이 따라온다.
“이 불안은 지금 아이 때문만은 아니구나.”
“예전에 내가 실패했던 기억이 같이 올라왔네.”
“남들보다 뒤처질까 봐 두려운 감정이구나.”
이 순간, 불안은 여전히 있지만 불안 = 나라는 등식이 깨진다.
여기서부터 관찰자 모드다.
아이에게 바로 말하지 않는다
충고 대신 시간을 둔다
감정을 아이에게 쏟아내지 않는다
“지금은 말하면 안 되겠다”는 판단이 생긴다
이건 참는 게 아니다. 반응하지 않아도 괜찮아지는 상태다.
이 차이가 굉장히 크다.
처음에는 불안이 줄어들지 않는다. 하지만 관찰자 모드를 몇 번만 반복해도 변화가 생긴다.
불안이 올라오는 패턴이 보이고
특정 상황에서만 과하게 반응한다는 걸 알게 되고
감정이 “또 왔네” 정도로 인식된다
아이 성적이 흔들릴 때마다 폭발하던 감정이 경고음 정도로 바뀐다.
여기까지 오면 삶은 이미 훨씬 쉬워진다.
충만 모드는 아무 욕망도 없는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아이를 위해 여전히 고민하고, 여전히 선택한다.
하지만 기준이 달라진다.
“안 하면 불안해서”가 아니라
“지금 이 아이에게 이게 맞아 보여서”
예를 들어,
학원을 하나 더 보낼 수도 있고
잠시 쉬게 할 수도 있고
아이와 대화를 먼저 선택할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 선택의 출발점이다.
충만 모드에서는 선택해도 마음이 덜 흔들리고, 선택하지 않아도 자신을 비난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이도 부모의 말에 덜 저항한다.
대부분의 부모는 이 순서를 반복하며 산다.
불안 모드 → 결핍 모드 → 생존 모드
그리고 여기서 빠져나오는 유일한 출구가 있다.
관찰자 모드.
관찰자 모드를 통해 감정의 출처를 이해하고 반응하지 않는 연습이 쌓이면, 자연스럽게 충만 모드로 이동한다.
이 글을 읽으며 “아, 내가 늘 여기 있었구나” 라고 느꼈다면,
이미 당신은 관찰자 모드에 들어와 있다. 그리고 그게 변화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