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불행한 사람
어떤 모임에 가면 항상 위로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 자기 이야기를 할 기회가 주어지면 좀처럼 멈추지 못한다. 처음엔 고개를 끄덕이게 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몸이 먼저 반응한다. 기운이 빠진다. 집에 돌아오면 아무것도 하기 싫다. 그리고 생각한다.
‘다시는 이 모임에 가고 싶지 않다.’
이건 예민해서 생기는 감정이 아니다. 인간의 심리가 보내는 정확한 신호다.
겉으로 보면 그 사람은 공감을 원하고, 위로를 바라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이야기는 상대를 향해 있지 않다. 질문을 받지도 않고, 반응에 따라 속도를 조절하지도 않는다. 그건 대화가 아니라 자기 존재를 유지하기 위한 독백에 가깝다. 듣는 사람에게는 폭력이다.
“누군가는 이 이야기를 들어줘야 한다.”
“그래야 내가 무너지지 않는다.”
이 상태에서는 공감이 목적이 아니다. 공감은 산소에 가깝다.
이런 사람들의 공통점은 분명하다.
관계의 붕괴, 오래된 상실, 인정받지 못했다는 감각
특히 이혼이나 실패의 경험이 있을 경우 그 사건은 과거가 되지 못한다. 계속 설명해야 하고, 계속 정당화해야 하고, 계속 피해자임을 확인받아야 한다. 그래서 같은 이야기가 반복된다. 이건 치유가 아니라 붕괴를 막기 위한 유지 장치다.
이런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안다.
누가 잘 들어주는지
누가 공감에 약한지
누가 거절하지 않는지
그 레이더에 걸린 사람에게 이야기를 쏟아붓는다. 상대가 지치거나 거리를 두면 다음 사람을 찾는다.
그래서 주변에서 보면 마치 새로운 청중을 찾아 헤매는 것처럼 보인다. 이건 악의가 아니라 혼자 감정을 감당하지 못하는 상태다.
사람들이 하나둘 모임에 나오지 않게 될 때 표면적인 이유는 항상 다르다.
바빠서, 일정이 맞지 않아서, 요즘 좀 힘들어서.
하지만 깊은 이유는 하나인 경우가 많다.
그 공간이 교류의 장소가 아니라 한 사람의 감정 처리장이 되었기 때문이다.
말하는 사람은 회복되지만 듣는 사람은 소모된다. 이 구조는 오래 갈 수 없다.
니체는 말했다.
무리가 아닌, 혼자일 때 행복할 수 있어야 한다고.
이 말은 고독을 찬미하는 문장이 아니다.
혼자 견디지 못하는 사람은 반드시 타인을 소비한다.
침묵을 감당하지 못하고, 자기 감정을 스스로 소화하지 못하면 타인은 도구가 된다.
이런 사람을 피하는 건 냉정함도, 이기심도 아니다. 그건 자기 에너지를 지키는 최소한의 경계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는 있지만, 누군가의 삶을 대신 지탱해줄 의무는 없다. 기운이 빨린다는 감각은 내가 약해서가 아니라 내 공감 능력이 살아 있다는 증거다.
모든 고통이 공유되어야 치유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고통은 스스로 견뎌야 비로소 지나간다. 그리고 그 경계를 아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과도 건강하게 함께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