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을 살지 못하게 하는 모든 세계관에 대하여

미래도 과거도 아닌, 충만한 현재에 대하여

우리는 왜 지금을 사랑하지 못하게 되었을까?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말한다.
“지금은 힘들지만, 나중에는 괜찮아질 거야.”

이 말에는 분명 위로가 있다. 하지만 동시에 아주 오래된 전제가 숨어 있다. 지금은 아직 완성된 시간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이 전제는 명확하다.
이 삶은 시험의 장이고, 고통은 견뎌야 할 것이며, 진짜 삶은 죽음 이후에 시작된다.

천국은 미래에 있다. 지금의 삶은 그곳으로 가기 위한 준비 과정이다. 그래서 고통은 설명이 된다.

“참아야 한다”, “의미가 있다”, “보상이 있다.”

하지만 그 대가로 현재는 늘 애매한 자리가 된다. 지금 이 순간이 아무리 좋아도 “영원한 것은 아니다”라는 생각이 붙는다. 현재는 머물러 살아도 되는 삶이 아니라 통과해야 할 구간이 된다.



과거에 묶이는 세계관도 다르지 않다

흥미로운 건 윤회를 말하는 세계관 역시 현재를 온전히 사랑하기 어렵게 만든다는 점이다.

윤회적 세계관에서는 지금의 삶을 이렇게 해석한다. 지금 겪는 고통은 과거 생에서 쌓은 업의 결과이고, 지금 누리는 행복은 과거의 공덕이 돌아온 것이다.

겉으로 보면 이 설명은 삶을 이해하게 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이유 없는 고통은 없다”라고 말해주니까.


하지만 이 관점 안에 오래 머물다 보면 현재는 점점 이런 모습이 된다. 지금의 삶은 내가 선택한 삶이 아니라 과거의 결과물이다.


왜 나는 이렇게 관계가 힘들까?
아마 전생에서 누군가에게 상처를 줬겠지.

왜 나는 이렇게 불안할까?
이건 과거의 업이 남긴 흔적일 거야.


이렇게 현재는 살아야 할 시간이 아니라 해석해야 할 대상이 된다. 행복조차도 마음껏 누리기 어렵다. 이 또한 언젠가 사라질 것이고, 다시 다른 업으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행복을 미래로 미뤘다면, 윤회적 세계관은 행복과 고통의 원인을 과거로 돌린다.

방향만 다를 뿐, 현재는 여전히 중심이 아니다.



현대의 긍정 이론도 구조는 같다

현대에 들어 사람들은 종교 대신 자기 계발과 의식 이론을 붙잡기 시작했다.

끌어당김의 법칙, 의식이 현실을 창조한다는 이야기, 원하는 미래를 생생히 그리라는 조언들.

겉보기에는 과거도, 죽음 이후도 아닌 ‘지금의 의식’을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이론들 역시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같은 구조 위에 서 있다. 지금은 아직 부족하다. 그래서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해야 한다. 지금의 현실은 바꿔야 할 대상이다. 그래서 아무리 긍정 확언을 반복해도 마음 한편에는 늘 이런 느낌이 남는다.


“아직은 아니야.”
“지금은 과정이야.”
“조금만 더 가면 괜찮아질 거야.”

현재는 여전히 완성된 삶이 아니다.



충만 모드는 질문부터 다르다

바샤르의 충만 모드는 이 모든 흐름에 제동을 건다.

충만 모드는 “어떻게 얻을까?”, “언제쯤 가능할까?”라고 묻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묻는다.

“내가 정말 원하는 삶을 이미 살고 있다면 지금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이 질문은 현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미래를 포기하라고도 하지 않는다. 다만 순서를 바꾸자고 말한다. 미래를 얻어서 상태가 바뀌는 게 아니라, 상태를 먼저 살 때 현실이 따라온다는 것이다.



‘원함’의 끝에는 언제나 감정이 있다

사람들에게 “진짜 원하는 삶이 뭐냐?”라고 물으면 대부분 이렇게 대답한다.

돈, 안정, 성공, 자유.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강남 아파트, 건물주, 세계 여행 같은 그림들이 붙는다.


하지만 여기서 조금만 더 묻는다.

왜?


왜 강남 아파트인가?
왜 건물주인가?
왜 세계 여행인가?


계속 ‘왜’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물질이 아니라 감정에 닿는다.

남들 눈치 보지 않아도 되는 상태. 시간을 내가 쓰는 느낌. 삶이 나에게 열려 있다는 감각.

즉,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무한한 부’ 그 자체가 아니라 자유로운 존재 상태다.


그렇다면 질문은 이렇게 바뀐다.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자유로운 존재처럼 단 10분이라도 살 수 있을까?”

이 질문이 충만 모드의 출발점이다.



미래의 삶을 지금 조금씩 산다는 것

내가 꿈꾸는 삶은 여행하며 글을 쓰는 삶이다.

전기차를 타고 자연 속에 머물며 글을 쓰고, 그 과정에서 느낀 생각과 깨달음을 사람들과 나누는 삶.

물론 이 삶에는 돈도 필요하고, 조건도 필요하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이거다. 완벽하게 같을 필요는 없다.

나는 지금도 비슷하게 살고 있다. 공원에 나가 노트북을 열고 글을 쓰고, 한 달에 한 번은 혼자 바다를 보러 간다. 아침에 커피 한 잔을 마시며 글을 쓰고, 강아지와 산책하며 햇빛을 받는다.

그 순간만큼은 이미 내가 꿈꾸던 삶을 살고 있다는 감각이 든다.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이렇게 미래의 삶을 지금부터 조금씩 살기 시작하면 정말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그 미래를 예전처럼 간절히 원하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이미 현재 안에 그 삶의 핵심이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현재는 더 이상 참아야 할 시간이 아니다. 현재는 이미 충분히 살아볼 만한 시간이 된다.


그때 비로소 사람은 깨닫는다.

“내가 원하던 미래는 사실 이것이었구나!”



아이들의 명문대라는 꿈을 다시 바라보면

아이들이 명문대에 가길 바라는 마음도 같은 구조다.

명문대에 합격한 미래의 부모로 지금을 살아본다고 상상해 보자. 그러면 아이가 조금 공부를 안 해도 예전만큼 불안하지 않다. 아이의 인생이 이미 괜찮을 것이라는 기본적인 신뢰가 있기 때문이다.


아이와 함께 있는 지금의 시간이 불안의 시간이 아니라 행복의 시간이 된다. 그리고 문득 이렇게 느낀다.

“아, 이게 내가 원하던 거였구나.”

사실 명문대는 목표가 아니라 과정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과정을 통해 좋은 직장에 들어가고 소위 말하는 성공이라는 것을 해야 행복할 수 있다고 믿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진짜 원한 건 명문대가 아니라 아이와 평온하게 웃고, 서로를 믿으며 살아가는 행복한 지금이었다. 그것이 이미 이루어졌으니 명문대는 목표에서 사라지게 된다.



관찰자가 아니라, 참여자로 살기

관찰자 모드나 투명 모드는 분명 도움이 된다. 고통을 줄여주고, 감정을 정리하게 해 준다. 하지만 거기에 오래 머물면 삶은 조금 멀어진다. 세상을 이해하지만 깊이 들어가지는 않는다.


문득 이런 질문이 떠오른다.

'신은 왜 이토록 복잡한 세상을 만들었을까?'

우리가 고통을 피해 영원히 관찰자로 머물길 바랐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신은 우리가 사랑하고, 괴로워하고, 기뻐하고, 절망하면서 이 세계를 온몸으로 체험하길 바랐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충만 모드를 선택한다

충만 모드는 현실을 미화하지 않는다. 고통을 부정하지도 않는다. 다만 이렇게 말한다.

“지금 이 순간도 이미 충분하다.”

미래로 도망가지 않고, 과거에 묶이지 않고, 지금 이 삶에 깊이 들어가는 태도.


그래서 나는 충만 모드를 선택한다.

이 세상을 설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대로 살아내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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