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상호 감독 영화 [얼굴]

장님은 못생긴 아내를 왜 죽였는가?

영화에서 도장 파는 남자는 못생긴 얼굴의 방직공장 시다발이 아내를 살해한다. 그는 장님이고, 가난하다.
하지만 자신을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믿을 수 있었던 이유가 하나 있었다. 아내가 아름답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를 놀리듯 말한다.

“미녀와 결혼했네. 복이 많다.”
그 말은 놀림이 아니라, 그가 붙들고 살 수 있었던 마지막 자존감이었다.


나는 장님이지만 나는 선택받은 사람이고 그래서 내 인생은 실패가 아니라는 믿음.

그러다 그는 알게 된다. 아내는 아름답지 않았다. 그 순간 무너진 것은 사랑이 아니라 자기 존재의 근거였다.

그가 느낀 감정은 분노가 아니다. 그건 배신이었다.

“나를 선택한 게 사랑이 아니라 네 수준에 맞는 장님이었기 때문이라면, 나는 처음부터 가치 없는 인간이었던 거잖아.”

그는 다시 돈 없는 장님, 아무도 존중하지 않는 인간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그는 아내를 죽인다.

아내를 없애면 이 현실도 함께 사라질 거라고 믿으면서.


이 구조는 영화 속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부모와 자녀 관계에서도 조용히, 일상적으로 반복된다.

부모는 말한다.
“나는 너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

하지만 그 말에는 대개 전제가 붙어 있다.


공부는 어느 정도는 해야 하고

남들보다 뒤처지지 않아야 하고

최소한 ‘부모로서 부끄럽지 않은 위치’에는 있어야 한다


이 전제가 유지되는 동안 부모는 안정적이다. 아이를 사랑한다고 느낀다. 문제는 그 전제가 무너질 때다.

자녀가 공부를 못하고 성적이 바닥을 치고 사회적으로 낮은 위치에 머무를 때 부모의 마음이 먼저 무너진다.

그리고 그 붕괴는 이렇게 번역된다.

“내가 인정한 자녀가 이 정도라는 사실이 나를 무너뜨린다.”

그 순간, 아이의 실패는 더 이상 아이의 일이 아니다. 부모 자신의 가치가 붕괴되는 사건이 된다.

부모는 아이를 실제로 죽이지 않는다. 하지만 많은 부모가 아이의 존재를 상징적으로 살해한다.


실망이라는 말로

비교라는 방식으로

침묵과 냉소로


아이는 이렇게 배운다.

“나는 조건을 충족할 때만 사랑받는 존재구나.”

이건 훈육이 아니다. 사랑도 아니다. 부모 자존감의 붕괴를 아이에게 전가하는 폭력이다.

영화 속 장님은 못생긴 아내를 죽인 게 아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을 뿐이다.

“나는 가치 없는 사람이 아니다.”
“이 삶은 내가 견딜 수 없다.”

그 외침의 대상이 가장 약한 존재, 가장 반박하지 않는 존재에게 향했을 뿐이다.


부모와 자녀 관계에서도 같다. 자녀가 부모 자존감의 기둥이 될 때, 그 기둥이 무너지면 사랑은 쉽게 폭력으로 변형된다. 그래서 부모에게 가장 불편한 질문은 이것이다.

“내 아이가 실패해도 나는 여전히 이 아이의 부모일 수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 대답을 미루는 순간, 사랑은 조건이 된다. 건강한 부모란 아이를 성공시키는 사람이 아니다.

아이의 실패 앞에서도 자기 정체성이 무너지지 않는 사람이다.


자녀가 공부를 못해도 사회적으로 낮은 위치에 있어도 이 말이 마음속에서 유지되는 사람.

“그래도 너는 존재 자체로 가치 있다.”

그 말을 끝까지 지킬 수 있는 부모만이 아이를 살해하지 않는다. 아이 곁에 남아준다.

조건이 무너질 때 사랑도 무너진다면 그건 처음부터 사랑이 아니었다. 그건 아이를 붙잡아 세운 부모의 자존감 구조였을 뿐이다.

그리고 부모가 해야 할 일은 아이를 성공시키는 게 아니라, 아이를 실패해도 버리지 않는 것이다. 그게 부모가 인간으로 남는 최소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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