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린스턴에서 만난 세기의 과학자
20세기 초에 미국 뉴저지를 기반으로 백화점 사업을 통해 큰 성공을 이룬 루이스 밤버거 (Louis Bamberger) 라는 사업가가 있었습니다. 대공황이 시작되기 전 그는 자신의 사업체를 모두 처분하고 남은 여생을 자선사업으로 사회에 기여하고 싶었습니다. 처음에는 뉴저지 지역에 의과대학을 설립하려 했다가 그 계획은 과거에 없던 혁신적인 새로운 형태의 순수과학 연구소를 설립하는 것으로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그렇게 1930년도에 설립된 연구소가 바로 고등학술연구소 (Institute of Advanced Study, 아래 사진)입니다. 당시에도 일반인들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이 연구소가 세계에 주목을 받게 된 것은 바로 첫 번째로 고용된 인물 덕분이었죠. 그가 바로 물리학의 '상대성이론'으로 유명한 알버트 아인슈타인입니다.
아인슈타인은 나치의 유태인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하기로 결심하고 1932년 고등학술원의 교수 자리를 수락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음 해 1933년 대서양을 건너 뉴욕의 엘리스 섬에 도착했습니다. 아인슈타인 박사는 이미 일반인들에게도 워낙 널리 알려져 있었기에 그의 입국은 큰 기사거리가 될 정도였죠. 뿐만 아니라 과학계에서도 아인슈타인이 독일을 떠나 미국으로 이주하게 된 것은 커다란 관심사였습니다. 프랑스의 물리학자 폴 랑주뱅은 아인슈타인을 미국으로 데리고 온 것은 '마치 바티칸 궁을 미국으로 옮겨 놓은 것과 같다'라고 말하며 이제 자연과학의 중심은 미국이 될 것이라는 예언적인 말을 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아인슈타인의 이주 이후 전쟁을 피해 더욱 많은 과학자들이 미국을 찾게 되었고 아인슈타인을 평소에 흠모하던 과학자들 (아래 사진)은 프린스턴으로 너도나도 모여들었습니다.
IAS 캠퍼스는 예나 지금이나 매우 한적하고 조용하며 주변은 거의 개발되지 않고 분위기가 잘 유지가 되었습니다. IAS는 이론물리학, 수학 기초과학이 강한 연구소였기 때문에 연구장비가 크게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캠퍼스라고 해봐야 큰 건물이 10개도 채 되지 않고 주로 강의동과 사무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캠퍼스는 600 에이커 남짓의 푸른 벌판과 숲이 펼쳐져있고 작은 연못(아래 사진)이 있어서 연구원들이 이곳에 머물면서 사색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동안 33명의 노벨상 수상자, 42명의 필드상 수상자가 이곳 거쳐갈 정도로 짧은 기간에 세계적인 수준으로 성장했다고 할 수 있겠죠.
아인슈타인은 IAS에서 1마일 남짓한 곳 머서가 112번지 하얀 목조건물 (아래 사진)에 둥지를 틀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습니다. 1800년대 초기에 지은 이 집의 2층에서 아인슈타인은 그의 일생 마지막 도전이었던 통일장 이론에 혼신을 쏟았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남은 생애를 보낸 아인슈타인의 평소 하루는 과연 어땠을까요? 지인에 따르면 그는 아침 느지막한 시간인 오전 10시쯤 집을 나와 연구소까지 천천히 걸어서 출근을 했다고 합니다. IAS의 연구원이었던 세계적인 논리학자이자 수학자였던 쿠르트 괴벨을 벗 삼아 거의 매일같이 이야기를 나누면서 걸었습니다. 사무실에 도착해서는 조수였던 발터 마이어와 두어 시간 동안 토론을 하다가 점심을 먹기 위해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식사 후 연구소로 돌아와서는 계속 혼자서 연구에 매진했다고 합니다. 1955년 4월 18일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아인슈타인은 통일장 이론을 완성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대신 그의 후배 과학자들이 그의 뒤를 이어 끈이론 등으로 세계 물리학계의 큰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