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의 발전을 이끌었던 천재들
순수과학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수학은 과거 19세기까지는 프랑스, 영국, 독일 등의 유럽의 수학자들에 의해 발전되어왔습니다. 그러다가 20세기부터는 미국으로 이주한 유럽 출신의 수학자들의 활약에 힘입어 세계 수학의 중심은 유럽에서 미국 동부로 옮겨집니다. 특히 프린스턴에 세계적으로 저명한 수학자들이 많이 모여들었습니다. 그 덕에 수학과 관련이 깊은 이론물리학이나 심지어 컴퓨터과학도 이곳에서 꽃을 피울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은 사실입니다. (아래는 프린스턴 대학교 수학과 건물인 Fine Hall)
1936년 영국 캠브리지 대학에서 수리논리학을 연구하던 23살 된 대학원생이 미국 프린스턴 대학으로 유학을 오게 됩니다. 이 사람이 훗날 컴퓨터의 아버지로 불리게 되는 앨런 튜링(Alan Turing) 입니다. 1912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튜링은 어렸을 적부터 수학적 재능이 뛰어 난 신동이었습니다. 1931년 캠프리지의 킹스칼리지에 입학하였고 그곳에서 학부를 마친 후 수학자 막스 뉴만(Max Newman)의 문하에서 대학원 생활을 하였습니다.
수리논리학적 이론을 연구하던 튜링은 자신이 추구하고 있던 '연산 기계'에 대한 이론적인 토대를 처음 연구한 학자가 미국 프린스턴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의 스승 막스 뉴만의 도움으로 튜링은 프린스턴 대학의 수리논리학 교수인 알론소 처치(Alonso Church) 박사와 연결이 되었고 튜링의 열정을 높이 산 처치 박사는 그에게 프린스턴에서 박사과정을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이렇게 튜링은 2년 반 동안 프린스턴 대학에서 수리 논리 연구를 하였고 1938년 Systems of logic base on ordinal (순서수를 바탕으로 한 논리의 체계)라는 논문으로 졸업을 하게 됩니다. 튜링의 프린스턴에서의 연구는 훗날 연산 기계인 컴퓨터를 개발하는 데 있어 이론적인 토대를 제공하는 연구였습니다. (아래는 튜링의 프린스턴 대학원 학생 기록 카드)
당시 프린스턴 고등학술연구소에 재직 중이던 천재 수학자 존 폰 노이만(John Von Neumann)은 그의 연구를 높이 평가하며 함께 프린스턴에 남아 연구해보자고 제안했지만 튜링은 2차 대전 발발을 이유로 폰 노이만의 제안을 정중하게 거절하고 영국으로 돌아갔습니다. 만약 튜링이 프린스턴에 남아 폰 노이만과 연구를 계속했다면 컴퓨터 개발의 역사가 어떻되 되었을까 재미있는 상상을 해봅니다.
영국으로 돌아간 튜링은 정부 산하 연구기관에서 독일의 암호화된 정보를 해독하는 기계를 개발하게 됩니다.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Imitation game)'에도 그려지는 내용으로 이때 개발된 기계가 봄브(Bombe)와 콜러서스(Colossus) 입니다. 영국 정부의 보안사항이라 1970년대가 되어서야 공개된 이들 기기들은 오늘날 최초의 프로그램식 기계형 컴퓨터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이들 기계가 최초의 컴퓨터로 평가되기는 하지만 영국 정부가 전쟁을 위해 진행했던 프로젝트였기때문에 전후에는 더 이상 개발이 되지 않았고 대신 그 내용이 캠브리지 대학으로 이전되어 민간 수준에서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아래는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에서)
콜러서스와 다르게 계산만을 하는 다용도 전자컴퓨터의 시초는 1946년 펜실베이니아대학 존 머출리와 프레스퍼 에커트에 의해 디자인된 에니악(ENIAC)이었습니다. 에니악은 당시 수학자가 계산기로 20시간 매달려야 풀 수 있는 내용을 단 30초 만에 풀어내었던 고성능 전자계산기였고 미군 미사일 비행 계산용으로 사용되었습니다. ENIAC의 본체는 17,468개의 진공관으로 이루어져 있고 높이 2미터에서 길이가 24미터짜리로 무게만 30톤이 나가는 실용성이 많이 떨어지는 모델이었습니다.
ENIAC이후 오늘날처럼 프로그래밍이 가능한 방식의 컴퓨터가 개발되었는데 이를 처음 디자인한 과학자가 바로 알란 튜링과 함께 이번 편에서 소개하고자 하는 과학자 존 폰 노이만입니다 (아래 사진).
과학자 사이에도 전설적인 천재로 알려져 있는 존 폰 노이만은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부유한 유태인 은행가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23살 때 스위스 연방공대(ETH)에서 화학공학으로 박사학위를 그리고 헝가리 부다페스트 대학에서 수학으로 도합 두 개의 박사학위를 취득한 그는 독일 등 유럽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가 28세 젊은 나이에 프린스턴 대학 교수로 임용되어 미국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2년 후인 1932년에는 아인슈타인과 함께 프린스턴 고등학술연구소 연구원으로 초빙되었는데 그는 이곳에서 수학, 양자물리학, 컴퓨터과학, 경제학 등 다방면에서 놀라운 업적을 이룩합니다.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할 당시 폰 노이만은 '전자계산기의 이론 설계 서론'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는데 이 논문에서 그는 처음 CPU, 메모리, 프로그램을 구조로 갖는 프로그램 내장 방식의 컴퓨터 모델을 제시했습니다. 이를 오늘날 폰 노이만 구조 또는 폰 노이만 모델이라고 부릅니다. 폰 노이만은 ENIAC을 만든 펜실베이니아대학 연구팀과 함께 협력하여 프로그램 내장 방식 컴퓨터를 개발하는데 이것이 최초의 전자 디지털 프로그래밍형 컴퓨터인 EDVAC 입니다 (아래 사진).
ENIAC과 EDVAC이 컴퓨터 역사에 특별히 중요한 이유는 바로 상업용 컴퓨터로 이어지게 되었다는 점이었고 이렇게 탄생한 최초의 상업용 컴퓨터가 바로 UNIVAC 입니다. Remington RAND 사에서 출시되었던 UNIVAC 은 당시 아이젠하워 장군이 대통령으로 당선될 확률을 계산했다는데 세간의 주목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 후 컴퓨터는 진공관에서 트랜지스터를 사용하게 되었고 1960년대부터 실리콘을 이용한 반도체가 양산되면서 컴퓨터 산업의 중심은 서서히 동부에서 서부로 옮겨가기 시작했습니다.
이번 편은 프린스턴에서 전개되었던 컴퓨터의 역사에 대해 소개해 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