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하지 않고 꾸준한 사람에게 자신의 계절은 꼭 오기 마련이다
장편소설 『작은 땅의 야수들』로
2024년 톨스토이 문학상을 수상한 김주혜 작가의 인터뷰 영상을 보았다.
9살에 이민을 간 작가가 왜 독립운동이라는 소재를 택했는지,
그 배경에 대한 설명이 특히 인상 깊었다.
그녀는 장편소설을 써야 한다는 에이전트의 요청 앞에서
막막함을 느끼고 있었다고 했다.
답이 보이지 않던 어느 날,
설산으로 조깅을 나간 그녀는
그곳에서 환영처럼 떠오른 이야기의 조각들을 만났다고 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단숨에 20페이지에 달하는 서문을 써내려갔다고 한다.
놀라운 건, 그 수많은 교정과 수정 속에서도
처음 썼던 그 서문만큼은 손대지 않았다는 것이다.
얼마나 강렬한 영감이었는지, 상상조차 쉽지 않다.
인터뷰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니,
나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작가는 실제로 독립운동에 참여하신 조부모님을 두었고,
그 기억이 마음 깊은 곳에서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치열한 고민과 성찰의 시간을 지나
그 이야기는 어느 순간 ‘툭’ 하고 세상 밖으로 나왔다.
마치 모소대나무처럼.
5년 동안 땅속에서 아무 변화 없이 기다리다
6년째 되는 해부터 하루에 30cm씩 자란다는 그 식물처럼.
결국, 그 이야기는
이미 그녀 안에 오래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종종 “포텐 터졌다”는 말을 쓴다.
어떤 사람이 눈부신 성과를 냈을 때,
마치 하루아침에 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런 ‘포텐’은
갑자기 터지는 것이 아니다.
그 누구보다 깊이 고민하고,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 내면에 차곡차곡 쌓여 있다가
어떤 계기를 통해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서 중요한 건,
결국 '내 때'가 올 거라는 믿음을 잃지 않는 일이다.
끊임없이 고민하고 성찰하며
포기하지 않는 자세 말이다.
코스모스는 봄에 피지 않는다.
진달래, 개나리, 벚꽃이 앞다퉈 피어나는 계절에도
코스모스는 조용히 기다린다.
자신의 계절, 가을이 올 때까지.
그리고 마침내 가을이 오면,
어떤 꽃보다도 환하게 피어난다.
만약 코스모스가
여름에 다른 꽃들과 비교하며 피기를 포기해버린다면,
가을이라는 자신의 계절을
영영 맞이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아직 나의 계절이 오지 않았을 뿐일지도 모른다.
아무도 봐주지 않아도,
쉼 없이 비교당하더라도,
지금 이 자리에서
묵묵히 내가 할 일을 해나가다 보면
언젠가 나의 때는 분명히 올 것이다.
그러니 그날이 올 때까지,
적어도 나 자신만큼은
나를 포기하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