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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함의 기준을 낮춰야 하는 이유

by 민수석

글로벌 회사에서 근무하던 시절의 일입니다.

신규 과제를 맡게 되었는데, 구조가 꽤 복잡했습니다.

기술은 영국에, 담당팀은 미국에, 고객은 한국에 있었죠.

저는 한국 고객을 지원하는 엔지니어였습니다.


과제가 시작되고 회의 일정을 조율하는데,

미국 매니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국 시간으로 1시에 하면 되겠어.”


순간 고개가 갸웃해졌습니다.

한국이 오후 1시면, 미국은 밤 9시, 영국은 새벽 4시였으니까요.


“오후 1시가 맞아요?”

제가 묻자 그는 웃으며 이렇게 답했습니다.


“No, 1:00 AM.”


그에게는 아무렇지 않은 제안이었습니다.

한국 엔지니어들은 새벽에도 일한다는 전제가 이미 깔려 있었던 거죠.

그건 그들에게 ‘특별한 부탁’이 아니라,

그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 당연함은 우리가 만들어낸 결과였습니다.

요청이 오면 새벽이라도 대응하고, 주말에도 메일을 확인하던 습관들.

그 열정은 결국 ‘당연한 기준’으로 굳어졌습니다.


누군가 그때 “그 시간은 어렵습니다.”

라고 한마디 했다면 어땠을까요.

회의는 다른 시간에 잡혔을 겁니다.

그리고 한국 엔지니어가 새벽에 일하는 게

‘당연하지 않은 일’로 남았을지도 모르죠.


회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당연히’ 더 많은 일을 맡습니다.

반대로 게으른 사람은

‘당연히’ 일을 덜 받죠.


문제는 그 당연함이 쌓여

열심히 하는 사람의 기준이 점점 낮아지고,

결국 가장 성실한 사람이 가장 먼저 지치는 구조가 된다는 겁니다.


당연함의 기준을 낮춰야 합니다.

그래야 정상의 경계가 지켜집니다.

그때 배웠습니다.


당연함을 바꾸는 건, 누군가의 작은 거절에서 시작된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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