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첫 번째 롤모델
아버지가 어느 날 검정고시 합격장을 내밀었다. 당시 우리 집의 상황은 최악 중에 최악이었다. 별의별 사건들이 다 일어난 와중에 아버지는 혼자 딸 셋을 키우고 있었다. 10대였던 나는 당연하게 마음을 담아 축하해 주었지만 그 합격에 얽힌 아버지의 노력에 대해서는 체감하지 못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일을 할수록 아버지를 존경하게 됐다.
애초에 나는 K-경로, 그러니까 한국 사회에서 정해놓은 루트에서 벗어난 지 오래다. 자의로 벗어났다고 볼 순 없지만 어찌 됐든 자퇴를 한 그 시점부터 한국 사회의 경로를 걷고 싶어도 걷지 못하는 사람이 된 거다. 물론 지금은 하루라도 빨리 그 경로를 벗어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적으로도 이전보다 훨씬 열린 세상이 되기도 했고.
아무튼 간에, 이 루트에서는 안정적으로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목표로 하는데 나의 아버지는 그것을 이미 충족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처음 검정고시 합격장을 봤을 때 조금은 혼란스러웠다. 그때 나는 안정적으로 일을 하고 있으면 더 이상 공부가 필요 없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물론 철없던 어린 시절의 이야기고, 지금은 공부란 건 끝이 없다는 걸 안다. 언제든 내가 원하는 때에 시작할 수 있다는 것도. 어쨌든 어렸던 나는 그 정도밖에 생각을 못했다.
그로부터 약 15년이 지난 지금은 아버지의 검정고시 합격장이 언제든 내가 도전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희망을 줬다. 아버지만큼 노력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아버지가 도전했으니, 나도 그렇게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가 검정고시를 위해 열 번도 넘게 중학교 졸업장을 떼러 갔다는 것도 최근에야 알게 됐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단숨에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고 실망한 게 아니라, 그저 묵묵히 자신의 목표를 위한 도전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15년 전, 그러니까 아버지가 검정고시를 준비하던 그때의 하루를 생각해 보면 아침마다 우리가 씻을 물을 주전자 2통에 연달아 끓이고(시골집의 기름보일러는 여러 명이 줄이어 씻으면 중간에 따뜻한 물이 끊기곤 했다), 김도 굽고 국도 끓이고 온갖 반찬 꺼내서 밥을 차려주고, 또 우리가 마저 준비하는 동안 설거지를 하고, 준비가 끝나면 학교에 데려다주고 또 야자가 끝나면 데리러 와주었다. 생각만 해도 정신없는 하루였는데도 싫은 기색 하나 없이, 힘든 기색도 없이 다 해주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삶을 놓지 않으려 노력한 아버지의 시간들에 대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대체 언제 공부하고 그걸 다 알아봤던 걸까.
아버지는 곧바로 방송통신대학교에 진학했고, 일과 병행하며 공부를 하다 보니 10년을 채워서 겨우 졸업했다. 그리고는 또 곧바로 대학원에 들어갔다. 이번에는 또 몇 년이 걸릴지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건, 아버지는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려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어떠한 시선이 두려워서, 나이가 많아서, 가족이 챙겨주지 않아서, 돈이 없어서. 이러한 핑계들이 아버지에게는 없었다. 물론 저러한 문제들이 다 핑계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하고 싶은 것을 못하는 이유만 이야기하며 도전하지 못하는 사람과, 어쩔 수 없는 문제를 뒤로 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한 사람의 차이는 크다. 또한 아버지는 비장한 결심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삶을 더 발전시키는 것을 기본으로 할 뿐, 어떠한 욕심으로 일을 크게 그르치는 일도 없었다.
아버지의 나이는 70을 바라보고 있다. 그럼에도 무엇을 더 배울지, 뭘 더 할 수 있을지를 생각한다. 그런 아버지를 보며 내 인생도 저랬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내 인생에 크게 반대를 한 적이 없다. 모든 일에 나의 결정을 존중해 주었는데, 어린 시절에는 그 결정이 너무 부담스럽기도 했었다. 하지만 스스로 결정해 온 시간들 덕에 나는 어딜 가도 자립심으로는 뒤처지지 않는 사람이 됐다. 그 덕분에 나만의 커리어도 쌓을 수 있었다. 가끔 인생에 조바심이 들고, 삶이 무겁다는 생각이 들 때면 아버지가 도전해 온 시간들을 생각한다. 무겁지 않은 인생을 살면서 천천히 앞으로 계속 나아가는 것. 그것이 내 삶의 목표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