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동거 철학
내가 일하는 부서의 동료 'J' 이야기다.
최근에 딸을 출산했고, 10살 된 아들이 있는 20대 아줌마다. 남편은 없고 보이프렌드가 있다. 그녀가 항상 힘주어 말하는 보이프랜드는 그녀에겐 연인이고, 아이들에겐 아빠다.
남편, 아내라는 호칭만 쓰지 않을 뿐, 두 사람은 여느 집 마냥 부부행세를 하며 산다. 들어보면 결혼해서 사는 사람들과 똑같다. 둘 다 직업을 가지고 있고, 각자 엄마, 아빠 노릇을 한다. 양육문제도 함께 힘쓴다. 집세, 세금 등을 지불하는 공동 어카운트(계좌) 하나에 나머지는 각자의 어카운트를 가지고 수입을 관리하는 등등이다.
(참고로, 대부분의 미국 커플-부부, 연인들은 집세, 세금을 위한 공동 계좌 하나를 두고, 서로가 합의한 금액만큼만 부담한다. 그 외의 수입은 각자 관리한다) 남자의 돈은 모두 여자의 것이 아니다. 공동 지출을 제외한 나머지는 각자의 주머니로 들어간다.
이런 지침 아래 그녀는 결혼 말고, 동거 지상주의를 주장한다. 나름 자기만의 강력한 동거 철학을 가지고 있다. 주위 친구들이나 직원들이 결혼한다고 자랑을 해대면 누군가 부러워하는 눈길을 주는 동안, 그녀는 피식 웃으며 콧방귀만 뀔 뿐이다.
우선 동거 얘기를 좀 하자면, 동거란 가족이 아닌(법적 관계가 아닌) 남녀가 한집에 사는 것이 아닌가. 미국인들은 결혼 전 동거가 대부분이라고 할 정도로 동거란 것이 생활화되어있다. 동거는 결혼을 하기 위해 거치는 과정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미국에서 남. 녀의 동거가 일찍부터 보편화된 것은 20대가 되면 거의 부모로부터 독립을 하는 이유다. 대학을 진학하든, 사회생활을 하든,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이들의 필요에 따라 룸을 사용할 짝꿍을 찾게 되면서 대개 시작된다.
무엇보다 기본적인 생활 자체가 싱글 수입으로 유지하기가 힘들다. 아파트 렌트비만 해도 천불이 훨씬 웃돌고, 차 유지비부터 생활비(각종 공과금 )까지 지출을 하려면 웬만한 월급으로는 빡빡한 생활을 해야 된다.
그러니, 동거란 미국의 생활 문화 같은 것이다. 특히 호감 가는 상대를 만났을 때 연애하며, 경제적으로도 서로 부담도 덜고 하면서 동거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이런 걸 보면 , 미국인들에게 "동거"란 서로 통하는 사람끼리 "동고동락"이라는 의미가 크다. 뭐, 다정하고, 알뜰하게 "함께 살기"이런 식이다. 부모의 허락이 필요한다든가, 그들의 간섭도 사양한다. 사회적인 가십거리나, 친구들 사이의 조롱거리도 아니다. 그냥 생활의 한 단면이다.
이렇듯 동거를 하는 사람들은 친구처럼, 연인처럼 한동안 함께 살며 서로에게 편해지고 익숙해진다. 대개는 여자들이 남자의 청혼(pop the question)을 받고, 법적으로 부부가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순서다. 반면에 결혼을 사양(?)하고 서로 합의하에 동거를 원하는 커플들도 많다.
미국에서는 부부가 아닌 동거를 파트너쉽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남자, 여자 친구 대신에 법적인 용어로는 "당신의 파트너" 이런 식으로 부른다.
바로, 직원 동료 J 가 선택한 파트너십의 동거다. 남편 말고 "보이프랜드, 애인이 좋아"라고 선포한 경우다. 그녀가 결혼을 마다하고 긴 동거를 원한 이유는 그녀에게도 상당한 동거 철학이 있다.
우선 그녀가 평생 동거를 선택한 것은 "결혼을 믿지 않는다"는 이유다.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결혼 후 속속들이 결별을 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동거할 때는 영원히 사랑할 듯하던 사람들이 결혼 후엔 시큰둥하게 변한다는 것이다.
혹, 이혼까지 가는 사태가 발생하면 자녀가 있을 경우와 재산 문제 등 이혼이란 과정이 심플한 것도 아니다. 동거란 어느 때고 마음이 변하면 복잡한 과정 없이 정리가 쉬워진다.
이것저것 따질일도, 싸울 일도 없다. 동거 커플이 헤어질 경우, 자녀가 있다면 자녀양육 권한은 전적으로 엄마에게 있다. 아이들의 성(Family Name)을 따르는 문제도 두 사람(동거인) 의견에 따라 자유롭게 정해진다. 결별을 하더라도 남자는 아이에 대한 법적인 부양책임이 없다. 아빠의 기본적인 도리는 모두 개인 몫이다.
'J'에게 동거가 꽤 이상적이고, 타당하다고 보는 결정적인 한 가지가 있다. 그녀의 부모가 이상적인 파트너십(동거)의 본보기라고 한다. 그녀의 부모는 근 30년간의 동거를 하고 있다. 그 사이에 자녀를 낳고, 남들처럼 지지고 볶고 하면서 사랑하며 별 탈없이 잘 살고 있다. 법적인 남편, 아내가 아니지만 사실상 연인관계에 있는 커플이다. 지금도 여전히 행복하다.
이것이 'J'가 긴 동거를 선택한 이유다. 결혼 말고, 동거도 괜찮아! 를 구호처럼 외치면서. 그녀는 사랑은 지키고 싶지만 단지 법적인 관계가 싫다. 법적인 고리로 서로를 묶지 않아 서로에게 더 애틋할 수 있다. 소위 밀당의 재미도 있지 않나.
남의 사람이 될 가능성은 언제나 있지만, 사랑이란 어쩐지 묶어두면 힘겹고 버거워서 도망쳐버리기가 쉽다고 한다. 굳이 사랑=결혼일 필요가 있나? 그저 의연하게, 자유롭게 사랑하기 위해. 오랫동안, 평생 동안 사랑하며 살고 싶어서다.
'J'의 결혼 변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