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년 8월 28일 일기
햇살이 바삭바삭한 하루였다.
계촌에서 돌아와 새벽 한 시에 잠들었는데 아침 일곱시에 눈에 반짝 뜨였다. 더 자려다 어제 미처 널지 못한 빨래가 떠올라 헹굼을 누르고 아침을 먹었다.
창 밖에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파란 하늘이 펼쳐졌다. 빨래가 헹굼으로 돌아가는 동안 지난번에 빨아두었던 이불을 팩에 넣고 청소기로 공기를 빨아들였다. 납작해진 이불을 한쪽 팔로 달랑 들어올리는 가뿐함. 베란다 수납장에 넣어두고, 분리수거할 박스를 끌차에 집어넣었다. 이래저래 눈에 드러나지도 않는 자질구레한 정리를 하고, 어젯밤에 도착하자마자 물로 씻어 널어두었던 돗자리를 개서 넣고, 빨래를 널고 다시 잤다. 네 다섯 시간은 잔 것 같다. 옆에서 같이 자던 달봉이가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깨우면 일어났다가, ‘주말이니까 더 자자. 이모 피곤해.’라는 말로 다독여서 곧 잠에 빠져들었다. 점심이 되어서야 일어나 밥을 먹고, 아침에 널어두었던 빨래를 만져보았다. 얇은 행주는 말 그대로 바삭바삭하게 말랐다. 가을이구나.
어제 가져갔던 담요를 세탁기에 넣고 돌렸다. 누군가 “빨래를 좋아하는구나?” 했을 때는 아니라고 말했는데, 이제보니 나는 빨래를 좋아하는구나. 세탁기가 돌아가는 동안 스마트폰을 뒤적이고, 게임을 하고, 그저 시간을 흘려보내다가, 창 밖의 파란하늘을 그냥 보낼 수 없어서, 그제서야 세수를 했다. 읽을 책을 꺼내들고 파란하늘이 잘 보이는 시골 까페에서 한참을 책을 읽다 돌아왔다.
조카가 태어나고 나서 내 삶은, 조카를 만나면서, 관찰하면서, 조금은 방향이 달라졌다. 아기가 뭘 알겠냐, 생각하다가도 자기 성격을 이른 시기부터 드러내는 걸 보면서 인간은 참으로 놀라운 존재구나, 새삼 깨닫는다. 어제 클래식 공연을 보면서 20개월 아기가 무얼 느끼겠냐마는, 제법 진지한 태도로, 눈을 떼지 않고 공연을 보고 듣는 걸 옆에서 지켜보며, 조카에 대한 사랑이 말 그대로 퐁퐁 샘솟는 걸 느꼈다. 아마도, 내게 조카가 좀 더 이르게 찾아왔다면, 내 삶도 달라졌을 것이다. ‘이래서 자식을 키우는구나’ 하는 생각이 드니까. 그런 조카를 키우는 내 동생도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새삼스레 하니까. 엄마가 된 내동생이라니, 여전히 놀랍다.
우리 삼 남매는 해 마다 생일 요일이 같다. 월과 날은 다르지만, 어찌된 일인지, 해마다 요일이 같다. 올해는 금요일이다. 놀라운 건 조카님도 요일이 같다. 이게 무슨 조화속인지, 우연의 일치에 웃다가도, 끊을 수 없는 어떤 연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마음이 울렁인다. 막내 생일이라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갑자기 눈물이 터져서 엉엉 울면서 갔다. 왜 눈물이 나왔는지는 언제나처럼 글이나 말로 다 설명하기 어렵다. 삶은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것인데, 조카의 존재는 하루하루를 경이롭게 받아들이도록 만든다. 그래서 좋다. 그래서 슬프다.
오늘 아침에 조카랑 영통을 했는데, 잘 자고 일어난 모양인지, 영상이 켜지자마자 침대 모서리를 잡고 헤드뱅잉을 했다. 신이 나면 그런다. 이모를 보고 신이 난다는 건, 이모로서 기쁜 일이다. 아직은 ‘임마’라고 부르지만, 곧, ‘ㅣ’ 모음을 정확하게 소리내는 날이 찾아오겠지.
책을 읽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차창을 내리고 가을볕과 바람을 누렸다. 따뜻했다. 바삭바삭한 느낌. 햇빛도, 공기도 바삭바삭. 조카도 자라면서 계절의 변화를 느끼겠지. 밤하늘의 별을 보고 반짝반짝, 손짓을 하는 아이니까, 누구보다 계절의 변화를 빠르게 눈치챌 것 같다. 오랫동안 계절의 변화를, 그 계절만이 주는 행복함을 느낄 수 있기를.
그러나 삶은 알 수 없어서, 내 마음은 행복함과 동시에 어마어마한 홍수 피해를 입은 네팔 사람들과 함께 한다.
더 이상의 피해가 없기를, 상처를 딛고 일어서는데 힘이 덜 들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