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의 기원담>, 김보영, 아작(2023)
길게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 두 시간. 쉬는 날에는 읽을 책을 들고 집을 나선다. 자주 가는 카페에 앉아서 귀에 에어팟을 끼고 두 시간을 내리 읽는다. 한 번 빠져들어 읽으면, 책 나름의 박자대로 훌쩍 훌쩍, 겅중 겅중 뛰는 느낌으로 읽는다. 한 시간 읽으면 100쪽 남짓이다. 50쪽 읽으면 삼십분이 지났다. 어김이 없다.
무언가에 빠져들 수 있어서 책을 읽는다. 손에 쥔 손전화기에 자꾸 시간을 뺏긴다. 하루에도 몇 시간이나 뭉텅이로 뺏긴다. 그에 대한 반대로, 억지로라도 책을 읽으려고 한다. 쉬는 날, 집에만 있으면 침대에 누워 손전화만 들여다보고 만다. 그래서 집을 나선다. 책을 들고.
책 내용에 푹 빠졌다가 나오면, 기분이 좋다. 그저 시간을 흘려보내지 않았다는 만족감, 책이 재미있다면 더욱 행복하다. 때로는 눈물이 차오르기도, 사람 많은 카페에서 남몰래 주룩주룩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책 읽기는 지난한 삶을 견디고 버티는데 가장 큰 힘을 보탠다. 위로를 받기도, 내 생각을 다시 한 번 확인하기도 하고, 체념하기도, 우울해하기도 한다.
깊은 구덩이에 빠진 적이 있다. 나도 모르는 새에 구덩이에 들어가서 정신을 차려보니 까마득한 아래에서 빼꼼한 하늘을 올려다보는 기분이었다. 2년 동안 상담을 받으면서, 시커먼 구덩이에서 기어올라왔지만, 때때로 다시 그 구덩이로 돌아가는 기분이 든다.
우울감의 까닭은 하나였지만, 이미 깊어진 구덩이는 하나로 끝나지 않는다. 상담을 받고 나서 ‘아, 저기 구덩이가 있구나.’ 알아챌 수 있게 되었다. 이게 가장 크게, 또는 아주 작게 달라진 점이다. ‘구덩이가 있으니까 조심해야지, 내 마음이 지금 이렇구나.’를 알아차릴 수 있다는 것. 알아차림으로써, 전처럼 깊게 빠지는 일을 막을 수 있다.
하지만 남들보다 자주, 구덩이가 생기고, 알아차리는 편인 것 같다, 나는. 금세 살아가는 게 얼마나 허무한지에 빠져서 비틀거린다. 알아차리고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거나, 영화를 보거나, 공연을 보지만, 나이가 들수록, 기후위기가 심각해질수록 더 자주 비틀거린다.
시작은 며칠 전에 읽은 기사였다.
폭염, 가뭄 등 극한 기상 현상이 갈수록 잦아지면서 어린 세대일수록 더 극심한 기후재난을 경험할 것이란 연구 결과가 나왔다. 파리협정의 목표인 ‘지구 기온 상승폭 1.5도’를 달성하더라도 2020년에 태어난 5살 아이들은 절반 이상이 극악의 폭염을 겪으며 살게 된다.
(...) 티에리 교수팀은 “젊은 세대일수록 기후 재난 직면 위험이 많이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해당 연구는 전 세계 177개국의 어린이 약 1억 2천만명을 대상으로 했다.
-한겨레 신문, ‘기온 상승폭 1.5도 목표 달성해도..2020년생 절반 폭염에 시름한다’, 운연정 기자, 2025.05.09.
조카가 2020년에 태어났다. 우울감이 심각해진 때와 같다.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은 엉망진창이고, 코로나라는 듣도 보도 못한 전염병이 전세계에 퍼졌는데,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것이 슬펐다. 그래서 상담을 받게 되었다. 한 번 빠져본 구덩이라서, 알아차리는 것도 빠르고 빠져나오는 것도 쉽다. 하지만 요즘은 굉장히 자주 빠지게 된다. 산불도, 들쑥날쑥한 날씨도, 이런 연구 결과 때문에도.
결국, 인간이 지구에서 사라지고 나면, 지구는 원래대로 돌아갈 것이다.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가 내려가면 온갖 생물이 다시 번성할테지. 인간을 제외하고. 얼마나 오랫동안 인간이 버틸지 모르겠다. 고위도로 올라가서 끝까지 끝까지 버티겠지. 한때 슬펐던 점은, 인간이 이루어놓은 그 모든 것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대나무로 부챗살을 만드는 방법부터, 빠에야를 만들 때는 생쌀과 사프란을 넣어야 한다던가, 일본의 여름밤은 불꽃놀이를 하며 끝이 난다던가, 누군가는 ‘여름이 끝나가는 소리가 들려왔어.’라는 가사를 썼다던가 하는 것들. 그 모든 것들이 사라지는 것이 너무나 슬퍼서 엉엉 울었던 기억이 있다.
지난 주말에 읽은 책 『종의 기원담』(김보영, 2023, 아작)이 기후위기로 인간이 모두 사라진 지구를 그려낸 SF다. 지구는 로봇이 사는 곳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생명체, 살아 움직이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무기생물이 생명이고, 유기생물은 생명이 아니라고 정의내린다. 소수의 과학자들이 유기생물에 대한 연구를 이어나간다. 미치광이 취급을 받으면서. 연구를 하면서 지금과는 다른 대기와 온도, 습도에서 유기생물-곰팡이, 씨앗부터 열매까지 자라나는 식물들, 바다와 비슷한 환경에서 번성하는 온갖 동물들-이 번성했음을 알게 된다.
책을 읽는 독자는 자연스럽게 로봇의 처지에서 인간의 모습을 빗대어 보게 된다. 로봇이 하는 말이나, 작가의 서술이 더욱 더 독자로 하여금, 지금 지구와 인간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신들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육체적인 죽음이 아니라, 자신들이 존재했음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문명과 역사, 자신들이 만든 음악과 그림과 문학, 쌓아 올린 무한한 지식을 기억해 줄 누군가를 원했고, 그것이 우리 로봇이었다는 설이다.(99쪽)
나만 이런 생각을 하는게 아니었구나. 고개를 들어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바라보며 눈물을 삼켰다. 눈물을 참으면 콧물이 나온다. 코를 훌쩍이며 책을 마저 읽었다. 책에서는 결국 성장해서 번식을 하는 유기생물인 인간을 방역하지 못하고 공존하는 것으로 끝이난다. 로봇을 만든 창조주, 신이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언젠가는 대기 성분이 바뀌어서 로봇이 아닌 인간이 다시금 지구에서 가장 번성한 종족이 된다는 것을 받아들이면서. 지금 인간이 지녀야 할 마음가짐도 이와 같을까? 우리는 앞으로 몇 번의 폭염을 거듭하며 살아남고, 죽어갈까? 내 조카는? 그 모든 시간이 무슨 의미가 있는걸까?
깊고 검은 구덩이가 입을 벌리고 나를 바라볼 때, 얼른 알아차리고 마음을 다잡는다. ‘한 번 해 본 거잖아. 괜찮아.’ 그렇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들었던 노래 가사에 결국 눈물이 터져서 흑흑 울어버리고야 말았다. 울어서 가벼워지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기꺼이.
공허함을 느껴도
손에서 놓칠 수 없는 이유가 이 가슴에 있어
설령 우울이 깊은 밤에 깨어나서
짐승처럼 덤벼들어도
기도를 까마귀가 갈라놓고
유탄과 같은 비가 쏟아지더라도
이 도시의 하늘 아래
당신이 있는한,
나는 도망치지 않아.
아기 울음 소리가 계단에 울리는 밤
냉장고 문을 열고
병에 담긴 물을 마시면서 다짐할게
욕망이 소용돌이치는 바다초자
Moon River를 건너는 듯한 스텝으로
뛰어 넘어 갈 거야 당신과
이런 나의 곁에 있어줄거지?
-Drifter, KIRINJI
(가사번역: https://blog.naver.com/bollce33/223422831720)
(2025.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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