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K대는 많다
"어~우리 아들 K대 갔어."
대학 입시가 끝난 2010년 12월, K대를 나온 아빠는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하셨다.
그리고 이 말 뒤에 웃으며 한 마디를 덧붙여야 했다.
"건국대도 K대잖아. 하하하."
K대를 나온 아빠를 보며 나도 K대를 가고 싶었다. 어려서부터 아빠는 형과 나에게 둘 중에 한 명은 K대에 가겠지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우선 나보다 입시를 먼저 치른 형은 실패, 이제 남은 건 나였다. 고3까지 내신 성적은 괜찮았다. 1점대 초반대였고 전교에서 7~8등 수준이었다. 하지만 1등에서 3등까지 주어지는 서울대 지역균형과 4등에게 주어지는 고려대 학교장 추천이 떠나고 나면 남은 수시 카드가 없었다. 내가 K대에 갈
수 있는 방법은 논술 일반 전형을 뚫거나 정시로 가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냉정하게 K대에 갈 방법은 거의 없었다. 내신만 1점 초반대였지 수능 모의고사 성적이 나오지 않고 있었다. 대부분의 대학은 2등급 2개를 최저등급으로 내걸고 있었다. 나는 그 최저등급 2등급 2개를 맞출 성적이 고등학교 3학년동안 거의 나온 적이 없었다. 한 마디로 내신만 좋은 학생이었다. 현재 내신 성적으로 현실적으로 내가 갈 수 있는 학교는 학생부우수자가 있는 한양대나 중앙대 정도였다. 그것도 최저등급 2등급 2개를 맞는다는 전제하에.
모의고사에서 간당간당한 퍼센트로 2등급 2개를 못 맞췄다. 수능까지 남은 기간 동안 조금만 더 노력한다면, 수능 때 어떤 초인적인 힘이 발휘돼서 아주 조금만 점수가 올라준다면, 일단 최저등급 2등급 2개는 달성할 수 있겠다는 희망이 있었다. 그럼 일단 한양, 중앙에 다니면서 반수를 해볼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게 내 목표였다.
43232 (언수외탐구2과목)
망했다 그냥 망했다. 최저등급 2등급 2개가 안 됐다. 수시는 그냥 다 떨어졌다 싶었다. 정시로는 더 암담했다. 눈만 높아진 나는 이대로 쌩 재수의 길을 가야만할 것 같았다. 그 때 K대(건국대)가 나의 손을 잡아줬다. 유일하게 퍼센트를 최저등급으로 보면서 3등급이라도 86%가 넘는 3등급이라 최저등급을 충족시킨 것이다. 그렇게 수시에서 건국대 기술경영학과에 합격하게 됐다.
합격의 기쁨을 느낀 것도 잠시였다. 내 목표는 건국대가 아니었음을 다시 깨달았다. 분명 내 수능 점수로는 갈 수 없는 좋은 대학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끝내고 싶지는 않았다. 내 모든 힘을 모아서 한 번만 더 기회를 얻고 싶었다. 합격자 발표가 난 12월부터 나는 친구와 함께 독서실을 끊었다. 독서실에 가방만 두고 피시방과 노래방을 돌아다녔지만.
대학과 스무살은 참 궁합이 잘 맞는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대학에 들어간 나는 무리 없이 스무살의 대학생으로 녹아들었다. 친구들을 사귀고 함께 술을 마시고 과 친구들의 CC에 설레기도 했다. 그렇게 1학년 1학기 중간고사를 봤다. 시험이 끝나고 경영대 운동회를 했다. 신나게 운동하고 술을 마셨다. 그러다보니 축제가 다가왔다.
대학교 1학년 첫 축제, 그것까지 맛 보고 나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게될 것 같았다. 이미 과 사람들에게 정이 많이 들었다. 더 이상 깊어지면 떠나려는 마음은 더 큰 의지를 필요하게 된다. 시간을 끌면 끌 수록 나에게 좋은 것이 없었다. 지금 자퇴를 해야했다.
부모님에게 자퇴를 말하자 당연히 한 학기만 마치고 휴학을 하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마음 급한 나는 그러지 못 하겠다고 했다. 작년 수능에서 최저등급도 못 맞춘 내가 1학기가 끝나고 남은 6개월 동안 뭘 할 수 있겠냐고, 지금부터 달려야한다고 말했다. 부모님과의 갈등은 지리하게 계속 됐다. 저녁에 시작한 이야기가 아침상까지 이어졌다. 아빠가 들고있던 신문지 뭉치로 머리를 맞기도 했다. 아무리 맞아도 내 의지는 확고했다. 지금 떠나야했다.
5월 14일 자퇴를 하러 학교에 갔다. 학교 후문을 지나 학생본부로 가는 길이었다. 축제가 막 끝난 모습이었다. 바닥에는 술, 음식 흔적이 가득했고 천막 등 각종 축제의 흔적들이 놔뒹굴었다. 축제의 잔해를 지나는 그 길이 유독 서글펐다. 나는 왜 인생을 돌아가야하는가. 그렇게 청춘의 흔적을 밟으며 나는 대학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