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RA VIDA_002
집 앞의 나무와 앞집, 그리고 옆집의 풍경. 코스타리카의 햇살은 무척이나 따갑다. 선글라스 없이 낮에 오랫동안 돌아다니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지금은 바람이 시원해서 많이 더운 날씨는 아니다. 저녁이 되면 오히려 쌀쌀하다. 하지만 4월에 가까울수록 더위가 절정으로 치닫는다고 한다.
핸드폰을 개통하러 통신사에 가기로 했다. 핸드폰 개통은 여권만 있으면 된다. 아침에 마리 씨께 위치를 여쭈니 바로 집 근처에 있다며 잠깐 같이 나가서 위치를 알려 주셨다. 통신사에 가기 전에 코스타리카 돈인 콜론이 필요해서 은행에 먼저 갔다. 현지 은행인 BCR(코스타리카 은행)은 문을 오전 11시에 연다. 한국처럼 9시에 열겠거니 하고 무작정 갔더니 11시에 여니까 다시 오란다. 경비원은 아침부터 나와 있는 것 같긴 하다.
나는 Plaza Real Alajuela(쁠라싸 레알 알라후엘라)라는 곳에 갔는데 일종의 몰 같은 곳으로 식당, 카페, 가게, 은행 등이 여러 건물에 걸쳐 모여 있다. 11시가 조금 안 되어 다시 갔는데 사람들이 줄을 서있었다. 내 앞으로 10명 정도? 기다리니 11시 정각에 문을 열어 준다.
코스타리카 은행은 한국처럼 업무에 따라 번호표를 뽑는다. 차례가 되면 모니터에 내 번호와 창구 번호가 함께 뜨고, 기계가 소리 내어 읽어 준다. 하지만 이렇게 바뀐 것은 최근 몇 년 사이의 일이고 지방에는 아직도 구식으로 업무를 처리하는 은행들이 있다. 의자에 온 순서대로 앉아서 차례를 기다리는 식이다. 창구에는 대부분 의자가 없고 한국의 고속터미널 창구와 비슷하다. 유리 너머로 은행원과 대화하며 일을 처리한다.
나는 20분 정도 기다려서 한국에서 환전했던 달러를 다시 코스타리카 돈인 콜론으로 환전했다. 영수증을 보여 주고 서명을 하니 한 장을 떼어서 줬다. 은행에 가기 전에 홈스테이비를 내고 남은 돈을 환전했는데, 14만 콜론 정도가 나왔다. 500콜론이 약 1달러이다. 홈스테이비는 달러로 지불하고 아침을 주는 조건으로 한 달에 300달러를 낸다. 싼 값은 아니지만 근처에 지낼 만한 적당한 집도 없고 자취를 하려면 가구나 가전제품을 전부 사야 한다. 이곳에서는 소위 말하는 '풀 옵션'인 집을 구하는 게 매우 어렵다.
은행에서 나와 근처에 있는 현지 통신사인 Kolbi(콜비)에 가니 특이하게도 문이 잠겨 있고, 문 앞에 경비원이 서있어서 사람이 오면 문을 열어 준다. 은행에서는 은행이니까 이러겠거니 했는데 이곳에서도 그런 시스템이라 신기했다. 은행과 마찬가지로 업무에 따라 번호표를 뽑아 주는 사람도 있었다.
내 번호표는 24번이었다. 2시간 정도 기다렸는데 내 차례가 오지 않았다. 처음에는 앞에 있는 TV도 보고 사람들 구경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는데 점점 지치고 배도 고파서 경비원에게 잠깐 나갔다 와도 되냐고 물어보고 근처의 스타벅스로 향했다. 옆에서 기다리던 여자는 왜 이렇게 오래 걸리냐며 돌아다니는 직원에게 항의를 하기도 했다. 아마 점심시간이 끼어서 직원들 중 몇 명이 나가버린 것 같았다.
스타벅스에서 미트파이인 empanada(엠빠나다)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아메리카노는 여기에서 café negro(카페 네그로)라고도 한다. 사실 메뉴판에 아메리카노가 안 보여서 주문할 때 에스프레소에 물을 넣은 커피가 뭐냐고 물어봤더니 대답해 주었다. 커피를 마시면서 메뉴를 천천히 다시 봤을 때 그제야 카페 아메리카노라는 글씨가 보였다.
현지 스타벅스 가격은 한국보다 약간 싸다. 엠빠나다가 아메리카노보다 조금 싸고, 아메리카노는 한국의 톨 사이즈가 한화로 3,000원이 조금 넘는다. 이곳에서는 톨 사이즈는 pequeño(뻬께뇨)라고 하면 된다. 하지만 커피 원두 생산지치고는 싼 가격이 아니다. 스타벅스 내에서 파는 디저트들의 가격은 한국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비싼 편이다. 코스타리카에 오기 전부터 물가가 비싸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막상 체감하니 앞으로가 살짝 걱정된다.
30분쯤 지나 다시 통신사에 갔는데, 이럴 수가! 내 번호를 한참 지나 40번대를 달리고 있었다. 번호표를 뽑아 주는 직원에게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으니 46번으로 다시 뽑아 줬다. 다행히 15분 정도 기다려서 내 차례가 왔다. 말이 잘 안 통하는 바람에 직원이 하는 설명을 거의 못 알아 들었다. 그래도 일단 USIM칩을 사서 내 아이폰에 넣고 싶다는 것과 현지 번호가 필요하다는 뜻은 통했고 직원이 알아서 개통해 주었으니 다행이었다. 내가 내 할 말만 해서 엄청 답답했을 거다. 번호도 크게 적어 줬는데 내가 확인을 하자 글씨를 못 알아본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바르게 써주었다. 짜증내지 않고 일 처리를 해준 건 고마운데 사실 직원이 타자 치는 속도가 너무 느려서 나도 조금 답답했다. 아무튼 30분 정도 걸려 개통 완료!
다음날 알게 된 사실인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코스타리카에서는 충전식으로 핸드폰을 사용하는데 그 직원이 나에게 USIM칩 값인 1000콜론만 받고 충전을 안 해준 것. 한화로는 2,000원쯤 된다. 아무튼 그래서 전화 수신만 되고 와이파이존에서만 인터넷이 됐다. 하지만 나는 이 사실을 하루가 지나서야 깨달았다.
핸드폰을 개통하고 3시쯤 동료 선생님을 만났다. 우리 옆집에서 홈스테이를 하시는데, 나를 만나기로 한 시간에 연락이 안 돼서 우리 집에 들렀다가 내가 은행에 갔다는 마리 씨의 말을 듣고 무작정 그쪽으로 왔다고 한다. 마침 통신사에서 나오던 나와 딱 마주쳐서 같이 학교에 갔다.
사무실 직원들과 인사를 하고 간단하게 티 타임을 가졌다. 학교에는 우리 말고도 다른 선생님 한 분이 계신다. 총 세 명이서 한국어 수업과 행정 업무를 함께 담당한다. 앞으로의 수업과 일정에 대한 회의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올 때는 나 혼자 집으로 왔는데, 오는 길을 헷갈려 물어 물어 찾아왔다.
오는 길에 AMPM이라는 곳에서 요거트를 하나 샀다. AMPM은 편의점인 것 같은데 생긴 건 작은 마트 같고 계산원이 두세 명 있다. 요거트는 한국의 비요뜨 맛이 날 것 같아서 샀는데, 먹어 보니 대체로 비슷하지만 초코 과자가 더 많이 들어 있고 밑에 딸기잼이 너무 달다. 비싸기도 해서 다시 사 먹지는 않을 듯. 이런 식품 말고 과일과 야채는 그나마 싸다고 하니 다행이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만 AMPM은 코스타리카에서 비싼 편에 속한다. 말 그대로 편의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