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URA VIDA_007
첫 과외 수업이 있었다. 선생님은 가르쳐 본 경험도 많으신 것 같고, 정확한 걸 좋아하는 분이다. 올바른 문법과 표현도 중요시하신다. 몇 달 후엔 실력이 어느 정도는 올라갈 것 같다. 물론 내가 원하는 만큼이 되려면 계속 공부를 해야 하겠지만. 아무튼 첫 수업은 성공적이었다. 선생님이 따로 교재를 제본해서 주셨고 그 교재를 기본으로 화, 수, 목, 금요일 오전에 두 시간씩 공부를 한다. 선생님과 이야기도 하고 교재는 교재대로 나가니 회화 연습이 많이 돼서 좋다. 시간과 돈을 투자할 가치가 있다. 주말에는 한 주 동안 배운 걸 복습해서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어야지. 아주 오래간만에 공부가 즐겁다. 수업료는 매주 내는데 앞으로도 계속 한 주가 시작될 때 선불로 낼 것 같다.
스페인어 수업도 처음이었지만, 코스타리카에서의 내 한국어 수업도 처음이었다. 가장 기초반 수업이었는데 학생들은 착하지만 한국어를 거의 못한다. 두 달 정도 이미 공부를 한 학생들이 내 말을 거의 못 알아듣는다는 건 다소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내가 잘 가르치면 된다. 나는 초급 수업이 제일 재미있다. 학생들과의 의사소통은 불편한 반면 가장 열정적인 자세를 보이는 것도 초급 학생들이기에.
8시에 수업이 끝나고 8시 반이 조금 넘어 집으로 돌아오니 마리 씨와 소피, 에스떼반 모두가 집에 있었다. 마리 씨가 저녁을 같이 먹을 거냐고 물어보셔서 시간이 늦기도 했고 나는 이 집에서 아침만 먹기로 해놓고 매번 뭘 얻어먹어서 오늘은 괜찮다고 했는데, 조금만 먹으라고 하시는 거다. 이곳 문화는 보통 거절하면 그런 줄 알고 더 이상 물어보지 않는데 한 번 더 물어본 게 이상해서 일단 알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마리 씨가 내 생일을 위해 음식을 준비했다고 하셨다. 며칠 전에 소피가 나에게 생일이 언제냐고 물어봐서 3월 1일이라고 했더니 아주 조금 남았다고 하기에 그냥 그렇다고 하고 넘어갔었다. 사실 친해지기도 전이라 파티 같은 건 정말 바라지도, 기대하지도 않았다. 'arepa venezolana(아레빠 베네솔라나)'라는 음식을 먹었는데 번역하자면 베네수엘라식 팬케익이다. 단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 내 식성을 파악하고 달지 않은 음식을 만들어 준 거다. 코스타리카에서는 보통 팬케익을 달게 만들어 먹는다고 했다. 빵처럼 생긴 또르띠야를 반으로 갈라서 한쪽에 참치와 토마토 등으로 만든 샐러드를 얹고 위에 치즈를 뿌린 후, 나머지 한쪽을 그 위에 올려 먹는다. 맛있다. 나중에 배워야겠다. 지난번에 소피가 해준 여기 음식만큼 맛있었다.
음식을 다 먹고, 접시를 주섬주섬 치우고 있는데 소피가 숨겨둔 케이크에 불을 붙였다. 나는 저녁을 먹으면서도 정말 감사해야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케이크까지 준비했을 줄이야....촛불을 불고 가족들과도 사진을 찍었다.
아침에 눈을 떠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족들과 함께 보내지 않는 생일이라고 생각했다. 내 생일은 국경일이라 거의 집에서 쉬면서 가족들과 함께 보냈는데 이곳에서는 첫 출근에 첫 수업까지 있었다. 그냥 아무 날도 아닌 것처럼 생일을 보내게 될 거라고 생각하면서 날 위한 작은 선물로 스타벅스 텀블러를 하나 구입하고 스페인어 수업에 갔었다. 사실 한국에서 텀블러를 가져오려고 했는데 짐을 싸다가 빼버렸고, 더군다나 이곳은 낮에 너무 더워서 물을 자주 마셔야 하는데 매일 물을 사 먹을 수도 없고 해서 텀블러가 필요했다.
실은 이곳에 오기 전부터 이번 생일은 가족들과 보낼 수 없다는 게 조금 서운했다. 물론 그래서 친구들과 가족들이 미리 생일파티를 해주었지만 그래도 부모님께서 내 생일날 내 생각을 가장 많이 하실텐데 내가 부모님 곁에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 슬펐다. 그렇게 조금 슬픈 생일로 끝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이곳에서도 가족들과 함께 생일을 보냈다. 좋은 사람들이다. 고마웠다. 무엇보다 부모님이 가장 고마워하셨다. 나는 이렇게 코스타리카에서 스물여덟 번째 생일을 맞았다. 더군다나 이곳에서는 스물여덟 번째 생일을 보내고도 다시 스물일곱 살로 살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 )
처음 코스타리카에 왔을 때 과연 낯선 장소, 낯선 문화 안에서 잘 적응하고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지만 괜한 걱정이었다. 나는 이곳에 온 지 2주가 채 되지 않았고, 이곳 문화를 파악하려면 당연히 한참이 걸리겠지만 그래도 그런 확신이 든다. 이곳 사람들은 비록 우리보다 풍족하게 살지는 못하더라도 마음만은 훨씬 풍족한 것 같다. 늘 차보다 사람이 먼저이고, 경적을 울리고 내가 먼저 지나가는 곳이 아니라 경적을 울리고 다른 이가 먼저 지나갈 수 있도록 하는 곳이다. 사람들도 대부분 친절하다. 분명히 힘든 날이 오겠지만 행복한 날이 더 많을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