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 마지막날. 전날 고향집에서 다시 컴백홈한 후 이 어마어마한 날씨에 집에 있는다는 사실에 왠지 죄책감이 들 것 같아 일단 나왔다. 어디를 갈까 고민하던 중에 사운즈 한남에 있는 스틸북스가 떠올랐다. 사실 약간 가기 귀찮은 감도 없지 않았으나 이럴 때마다 떠올리는 문장이 있다. ‘먹을까 고민될 때는 먹지말고 할까 말까 고민될 때는 무조건 하라.’ 가기 싫었을 때 가면 항상 뭔가를 얻어 온 기억이 많았었다. 이번에도 우연스러운 발견의 기쁨에 기대를 걸고 발걸음을 옮겼다.
사운즈 한남은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이다. 첫 방문은 스틸북스가 열기 전이었다. 역시 특이한 구조가 주는 공간의 느낌은 다시 봐도 신선했다. 이국적인 느낌이 강하다. 정사각형의 통로, 가운데 패티오(Patio)을 중심에 두고 테넌트가 삥 둘러싼 구조. 모든 가게들을 들러본 것은 아니지만 리테일 MD도 꽤나 마음에 든다. JOH라는 브랜드의 힘을 다시 한번 느낀다.
예전에 살던 아파트 단지 내에 빨간 벽돌로 지어진 오래된 상가건물이 있었다. 바닥도 붉은 색 타일이었고 구조도 일반적인 건물과는 약간 다른게 이국적인 느낌이 강한 건물이었다. 그 건물에 대한 기억이 나한텐 매우 깊숙히 베어있다. 분명 다르지만 사운즈 한남을 볼 때마다 그 건물의 느낌이 떠올랐다. 빽빽히 들어선 느낌이라기 보다 여유가 느껴지는 구조다. 그래서 약간은 친숙한 기분도 든다.
스틸북스에 들어갔더니 좁은 내부에 많은 사람들이 책을 구경 중이었다. 처음엔 너무 좁아 보여 살짝 실망할 뻔하다 2층 계단을 발견했고 2층을 다 보고 내려가려던 찰나 3층 계단을 발견했으며 또 내려가던 찰나에 4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눈에 들어왔다. 뭔가 숨겨진 아지트를 발견하는 기분이라 아주 흡족했다.
각 층별로 장르가 구분되어 있었고 내가 가장 오래 머무른 공간은 2층이다. 최애 관심사인 요리와 여행, 경제/경영서 등이 모여 있었다. 한창 들여다 본 큐레이션은 요리에 관한 섹터였으나 가장 신선했던 것은 메인 큐레이션인 <THE AGE OF WASTE: 쓰레기/낭비의 시대> 섹터다. 독립서점을 그리 많이 다니는 편은 아니지만 이토록 탄탄한 큐레이션을 하는 곳은 처음이었다. 큐레이션의 수준을 면밀히 판단할만큼의 레베루가 되진 않지만 훌륭한 예술작품을 마주쳤을 때 쏟아지는 아우라가 느껴지듯이 어느 정도는 그 삘을 느낄 수 있었다. 대형서점에 갈 때마다 느껴졌던 뭔가 공허했던 마음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이미 그곳은 ‘그래, 이거야!’ 할만큼의 발견의 아지트가 되어 있었다. 도대체 어떤 책을 사야 후회를 덜 할 지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부터 먼저 살지 고민하는 나를 발견하고서 또 한번 아빠미소를 지었다.
메인 테마를 여기서는 스틸 큐레이션이라고 부른다. 이번 스틸 큐레이션의 키워드가 쓰레기와 낭비이며 이것도 주기적으로 바뀌는 것 같다. 이번 큐레이션이 마음에 들었으니 다음 큐레이션이 궁금해지는 건 당연한 이치. 개인적으론 서점의 다음 큐레이션이 궁금해진 첫 경험이다. 대형서점에서는 시선이 많이 분산되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그러한 기대감을 느끼기 힘들었다. 지금까지 다녀 본 몇몇 독립서점에서도 크게 이런 느낌을 받은 적은 없었다.
회사 근처에 있는 최인아 책방을 좋아해 자주 방문하는 편이긴 한데 스틸북스에서는 최인아책방과는 또다른 기대감이 느껴진다. 이번에는 전반적으로 훑어보는 정도였지만 아무래도 다음에 다시 방문하면 큐레이션 방식을 살펴보며 어떻게 기획을 하게 되었는지 봐야겠다. 왠지 해체하고 추상화하고 싶은 마음이 솟아난다.
이번에 스틸북스에서 구입한 두 책은 사실 내가 읽고 싶은 책 리스트에 올라와 있었다. 큐레이션의 영향이라고 보기는 힘들지만 일단 읽기로 한 거부터 읽어야 할 것 같아서 구매했다.
<한식의 품격>을 쓴 이용재 저자는 저자 소개로는 음식 평론가이자 번역가, 건축 칼럼니스트다. 그를 알게 된 건 그의 블로그를 통해 알게 되었다. 봐야지 봐야지 하다가 눈에 띈 김에 바로 집어들었다. 이 책이 보고 싶었던 이유는 요리에 관심은 있으나 주로 국외 음식 위주라 우리나라 음식에 대해 알아야겠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물욕 없는 세계>는 인터넷에서 공유된 걸 몇 번 보기도 했고 제목과 카피가 지금의 트렌드가 반영되어 있는 것 같아 궁금해서 골랐다. 내용은 어느 정도 예상은 되나 그 생각의 깊이가 궁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