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Things

나는 악필이다

사각사각 ASMR

by 진인사

나는 악필이다. 손으로 글을 쓰는 것보다 키보드를 두드려 글을 쓰는 것이 더 익숙하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저장 버튼을 누르는 순간, 내 글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손글씨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다.


종이에 글이 써질 때 나는 사각사각 소리가 좋았다. 종이의 표면과 펜촉 사이의 마찰은 진하고 깊은 자국을 남긴다. 그 자국에는 글쓴이의 생각과 감정이 녹아 있다. 마음이 편하지 않으면 글도 거칠어지고 마음이 평안하면 글도 반듯하다. 누구나 고유한 필체를 가지고 있기에 손글씨는 글의 주인이 누구인지 증명해 주는 식별자다.


글씨를 잘 쓰고 싶었지만 생각처럼 잘 되지 않았다.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마음을 잘 다듬는 것이 필요했다. 자연스럽게 명상에도 관심이 생겼다. 새벽에 일어나 좋은 문장 하나를 적어보는 것으로 마음의 평온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점점 내 글씨를 알아볼 수 있게 되는 것이 신기했다. 마음이 정돈되어 글도 정돈되는 것인지 한 문장씩 써보는 연습이 가져온 결과물인지 알 길이 없다.


글쓰기에 자신감이 생겼을 즈음 처가 어른들께 손으로 꾹꾹 눌러쓴 짧은 메모를 담아 용돈을 드린 적이 있었다. 내심 기대를 했으나 글솜씨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으셨다. 아직 누구에게 뽐낼 실력은 아니었다는 것이 증명되면서 다시 겸손을 되찾았다.


글쓰기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주변사람들의 필체에도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글에는 성격이 드러난다. 말과 행동이 시원하고 거침없는 사람은 글씨도 거침없다. 말이 점잖고 꼼꼼한 성격의 사람은 글도 점잖고 꼼꼼하다. 말이 헤프고 행동이 덤벙거리는 사람은 글씨도 덤벙거리고 내용도 변변치 못하다. 간혹 말과 행동이 필체와 다른 이를 만나기도 한다. 그럴 때면 그 사람의 진면목을 알아내려고 더 관심을 가진다.


세상에는 글씨를 잘 쓰는 사람들이 참 많았다. 누가 봐도 이쁜 글씨를 쓰는 사람도 있지만 투박하지만 진솔하고 정직한 글씨체를 가진 사람도 있다. 모두 매력적이다. 안타깝게도 상대방의 진짜 필체를 알기 쉽지 않은 세상이다. 디지털로 소통하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린 지금 손글씨가 적힌 누군가의 작은 쪽지를 받게 된다면 이보다 더 설레는 일이 있을까?





처음 써본 만년필은 자바펜 만년필이다. 한 번도 써본 적 없었기에 저렴한 만년필을 선택했었다. 병잉크와 만년필 세트로 되어 있는 상품을 인터넷으로 샀다. 처음으로 손글씨의 세계로 데려다주었다. 사각사각 필기감이 만족스러웠다. 언제나 휴대하고 다녔지만 아껴 쓰느라 정작 많이 사용하지는 못했다.


최근에 만년필을 바꾸면서 딸에게 물려주었다. 초등학생이지만 아빠의 만년필이 탐이 났는지 가지고 싶어 했다. 딸도 아빠를 닮아 글이 못났다. 만년필이 익숙해지면 글씨도 더 이쁘게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선뜻 건네주었다. 솔직히 새 만년필을 사기 위해서 딸에게 강제로 물려줬다는 것이 더 정확하다.


자바펜 만년필을 딸에게 (강제로) 물려주고 새로 산 것은 가성비가 좋다고 소문이 난 트위스비 에코 만년필이었다. 포장은 심플하고 정갈하다. 펜을 바꾸면서 잉크도 바꿨다. 라미(LAMY)의 청색 병잉크가 마음에 들었다. 파란색 글씨는 정돈된 느낌이 강하다. 업무를 하면서 발생하는 출력물에 파란색으로 메모를 하면 왠지 더 깔끔해 보인다.


자바펜 만년필은 일상이나 업무에서 사용한 적이 거의 없었지만 트위스비 에코 만년필은 항상 휴대하며 종이에 뭔가 적을 일이 있을 때마다 꺼내 사용하고 있다. 만년필을 사용하면 관심을 가지고 궁금해하거나 신기하게 봐주는 사람들이 제법 있다. 겉으로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지만 속으로는 아끼는 내 자식을 누군가 알아봐 준 것 같은 뿌듯한 감정이 생긴다. 그렇다. 나는 아직 초보 만년필 사용자다.


더 비싸고 좋은 만년필이 많이 있지만 글로 소개할 정도로 만족하면서 잘 쓰고 있다. 만년필을 잘 모르는 사람들도 알 만큼 몽블랑은 유명하다. 내 만년필을 몽블랑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지만 내가 사용하는 동안에는 몽블랑이라 생각하고 많이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려 한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쓸모의 부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