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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스쿨 윤정현 May 14. 2024

자아의 최고 분화 상태 ; 무아

감정과 사고의 분리 상태(자아의 탄생과 흐름도, 이어서)


자아는 그 성장 형태에 따라

대략 네 가지 형태로 분화된다.


첫 번째, 타인의 감정 지배 상태 ; 감정적

타인이나 환경 또는 스스로의 감정에

지배받는 상태다.


감정이나 타인에 종속된 노예 상태로

아무리 어른이 되어도

의존적이면서 마마보이 상태에 있다.


아니면 독선적이거나 자책적이며,

분노조절장애로 자제력을 상실하거나

극단적 감정을 표출하는 유형이다.


두 번째, 인정 욕구 상태 ; 정서 지배적

목표지향적이지만 인정 욕구가 강하여

그 방향이 타인에 의해 흔들리기 쉽다.


성장하면서 칭찬이나 격려,

지지와 인정받지 못한 영향이 크다.

애정 결핍으로 인하여 오는 현상으로

채워지지 않으면 평생 욕구에 시달리거나

다른 것으로 채우려는 욕구불만이 나타난다.


세 번째, 자기 관리 상태 ; 이성적

논리적, 합리적 지성인의 삶을 선택한 사람이다.

감정적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쓸모없으며 에너지 낭비임을 안다.


깊은 지식을 갖고 있기에

자기 관리, 통제, 절제를 잘 하지만

혼돈스러운 상황에서는 갈등하는 유형이다.


왜냐하면 이들의 선택적 잣대는

자아실현 이전의 이성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 기준이 '나'의 상태이냐 아니면

'우리'의 공존을 위한 '옳음'의 차원이냐가 그 선을 가른다.


네 번째, 문제해결 능력자 ; 감정과 사고 분리 상태

일반적으로 자아실현자라 부르는 유형이다.

감정과 사고가 분리된 상태로 인식한다는 의미는

감정은 단지 기분을 감지하는 센서임을,

사고는 그 기분이 무엇으로 인해 일어나는지 아는 상태다.


그리고 그 기분의 긍정적, 부정적 에너지에 대해

어떠한 심리가 내재되어 있으며

어떤 논리적, 합리적인 언어로 해석 및 반응할 때

그 결과는 어떠한 상황이 일어나는지까지

자신에 대한 객관화가 이루어진 사람을 말한다.


냉철하지만 공감력이 뛰어나며

갈등이나 방황하지 않고

오히려 많은 문제를 해결해 내는 능력이 탁월하다.


그에 맞는 해결적 방안을

편안한 상태로 전달할 수 있는 내공이 있기에

삶의 문제에 대한 흔들림이 없다.


오히려 삶과 죽음에 대해 초연하며

단지 이곳에서의 삶을 여행으로 생각한다.

삶의 가치관이 명확하게 정립되어 있으며

이들의 관점은 이성적 '나'가 아니다.

오직 '우리'의 더 나은 공존을 위한

'옮음'의 차원으로만 모든 존재를 바라본다.


곧 이들은 삶의 해탈자이다.

모든 사물과 사건, 사람이나 현상에 대해

알아차림이라는 인식의 관찰을 통해

이 상태에 이른다.


이 알아차림이 바로 의식이 깨어난 상태다.

이때부터 진정한 의식이 작동하면서

사물이나 사람에 대해 주도적인

올바름과 하나 된 의식으로 인식하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자기 주도적으로 사는 것 같지만

타율적, 수용적, 관행적, 반복적인

무의식에 지배당하면서 살아간다.

감정에 지배당하는 형태가 그것을 증명한다.


감정이 자신이 아니라는 분리가 일어나면

자신 앞에서 직접적으로 욕을 하고

비난과 이간질을 해도 감정으로 대처하지 않는다.

그는 흥분하지도 않으며,

상대의 언어에 무슨 의미가 들어 있어서

저렇게 말할까를 분석해 내고,

그 사건을 오로지 문제해결의 관점으로만 본다.

그리고 반드시 상대에게 논리적,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한다.


첫 번째 유형은 감정에 지배당한다면

두 번째 유형은 욕구에 지배당하며

세 번째 유형은 이성과 논리에 지배당하며

네 번째 유형은 존재적 삶을 사는 사람이다.


세 번째 유형까지는 고상할지라도

자아의 상태에 머물러 있기에

모양만 다를 뿐 여전히 자아에 지배당하는 상태다.

이는 조나단 갈매기가

완전한 속도에 이르지 못한 상태와 같다.

그가 다시 자기 고향으로 돌아와

후배들을 도울 때 그는 존재적 삶으로 해탈한 후였다.


이 상태의 단계적 성숙,

곧 자아의 고도화된 분화로 의식이 깨어

모든 관점을 알아차림의 단계에 이름은,

가치 철학적 앎과 내재된 의식의 일치를 이룰 때 완성된다.

앎과 의식의 일치라 함은 쉽게 언행일치를 말한다.


이러한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겉으로는 휘황찬란한 삶을 살아갈 수 있어도

내면적으로는 괴롭고, 공허한 삶만 쳇바퀴처럼 반복한다.

그 어떠한 것을 이루었을지라도

영원히 고독한 외로움에서 몸서리치는 삶을 벗어날 수 없다.


이것은 모든 성현들이 설파했던 거대한 우주적 진리다.

그 고(苦)의 윤회는 다시 돌아오는 삶을 통해서도 반복된다.

그 끝은 현생에서 다시 태어날 때,

곧 의식의 눈이 각성할 때만 멈춘다.


이때 행복은 자신의 본모습을 드러낸다.

이타애적 사랑은 하고 싶어서 하는 것도 아니요

하지 말라고 해서 안 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컵에 물이 넘치듯 저절로 흘러넘친다.


사랑은 달라고 해서 주는 것이 아니다.

진리와 행복 또한 그렇다.

이미 내 안에 존재한다.

의식의 각성을 통해 드러나면서

빛이 밝혀진 것뿐이다.


그럼 존재적 삶을 위한

가치 철학적 앎과 내재된 의식의 일치는

어떤 의식의 전환 과정을 통해

내면에서 영원히 공허와 외로움이 사라진 상태로 발현될까?

(계속)



윤 정 현



자아는 내면에서 진정한 앎을 알기 전까지

공허의 배고픔을 멈추지 않는다.

그 허기가 채워지면 이제 자신에게서

타인에게로 그 시선이 옮겨진다.

이것이 알아차림이요 의식의 전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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