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터 수수진에 대해 조금이라도 정보가 있는 사람이라면, 시각 예술 관련 전공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관련 학위를 가졌을 경우, 네트워크라는 혜택에 더불어 좀 더 빠르게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분야가 그렇겠지만, 그림은 '기술'에 가까워서 전공에 관련 없이 실력만 있다면, 과업을 하는 데 있어 지장은 없다. 물론 나도 과거에는 서양화 전공을 목표로 열심히 훈련했었다. 어릴 적부터 그림 그리는 걸 정말 좋아했고, 그래서 당연히 시각 예술을 직업으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나는 남의 눈치를 많이 보는 청소년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미국으로 교환학생을 다녀왔는데, 한국에 돌아와 학교에 복학한 이후, 남의 눈치 보는 게 더욱 심해져 내 그림도 덩달아 눈치 싸움의 희생양이 되어버렸다. 미대 진학을 원하는 고3 학생은 예체능 시간에 미술을 선택해 입시를 위한 준비를 꾸준히 할 수 있는데, 아무리 봐도 내 그림은 다른 친구들에 비해 디테일이 많이 떨어졌다. 성적으로 비교당하는 것도 힘든데, 열심히 그려낸 그림까지 늘 비교의 대상이 되니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림을 너무 못 그려 입시를 치를 자신이 없었다. 결국 미대에 대한 목표는 싹 접고, 숭실대학교 평생교육학과에 진학했다. 대학 졸업 후, 전공에 맞춰 교육 과정을 기획하는 회사에 들어가 일했고, 이후에도 크게 벗어남 없이 기획과 운영에 관련된 일을 했다.
그림에 손 뗀 지 오래되긴 했지만, 아예 무관한 삶은 아니었기에 일러스트레이터가 된 것도 그저 우연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미대 입시를 포기한 동시에 그림까지 포기했던 내가 그림을 직업으로 삼게 된 가장 큰 계기는 의외로 인스타그램의 도움이 컸다. 잘 그리지는 못하지만 좋아하는 게 이것뿐이라 취미 삼아 그린 그림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의외로 주변 반응이 좋아 그림만 모아보자는 생각으로 프로젝트158이라는 아이디를 만들어 그림을 하나하나 올리기 시작했다(프로젝트158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 취미로 시작했던 이 계정에 점점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인스타그램에 올린 그림을 모아 <수수한 드로잉 북>이라는 독립출판물을 만들었다. 정리하자면, 수수진은 얼렁뚱땅 인스타그램이 만들어낸 일러스트레이터다.
서양화 기법으로 배운 빛과 그림자 표현이 너무 고생스러워서 싹 다 빼 버리고, 정확히 그리기 위해 스케치북 한 권에 들였던 훈련이 무색하리만큼 선도 대충 그려버렸다. 그런데 이게 웬걸, 투박해 보이는 그림이 좋다는 사람이 여럿 생기고, 이걸 배우고 싶다는 사람도 있었다. 신기한 일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여전히 내가 그림을 잘 그리는 일러스트레이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그린 인물 그림은 약간 뚝딱거리고, 오브제는 전반적으로 오른쪽을 향해 휘어져있다. 더 정교한 그림을 위해 노력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단점을 고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단점을 특징으로 바꾸는 사람도 있다. 나는 후자를 택했다. 내 그림이 가진 단점 덕분에 수수진만의 독특한 그림 세계를 갖게 되었다. 그림은 못 그려도, 나는 나만이 가능한 그림을 그린다. 이 단순한 원리는 단지 그림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다. 싫어하는 것, 혹은 나만이 가진 단점을 모아 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결국 단점 목록은 나만이 가진 독특한 성질이라는 걸 알아차리기만 한다면, 고칠 것 투성이었던 삶은 갑자기 독창적이고 기대되는 성질의 것으로 바뀌어있다. 본인의 단점을 깊이 잘 아는 사람은 그걸 통해 대체 불가능한 사람이 되고, 우리 모두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