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랜서의 일에는 늘 납기일이라는 게 있어서 정해진 시간 내에 과업을 해내야 한다. 스스로 가장 자부하는 것 중 하나는, 납기일을 철저히 지킨다는 점인데, 천재지변이 일어날 것을 대비해 마감일은 조금 넉넉하게 잡아놓고, 그것보다도 더 앞서 일을 마쳐놓는다. '일'이라는 분야에서 열심을 다하기 때문에 일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모두 느슨하게 간다. 매사 각 잡힌 상태로 살면 너무 힘들고 피곤할 거다. 그래서 정해진 시간에 글을 생산하는 연재의 방식은 나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아니, 창작의 영역에 규율을 넣고 싶지 않았다는 게 좀 더 정확한 설명일 것이다. 그래서 쓰고 싶은 기분이 들 때 글을 썼고, 그리고 싶은 기분이 들 때 그림을 그렸다. 그렇게 생각했던 사람이 갑자기 브런치 연재라니? 내가 글을 연재하기로 한 데는 나름의 사연이 있다.
한 출판사로부터 출간 제의를 받았다. 프로젝트158 블로그의 글을 보고 책으로 엮어 출간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작년에 다른 출판사와 에세이 출판에 대한 계약을 마쳤으나, 편집자가 퇴사하게 되면서 원고의 행방이 묘연해졌다. 오래도록 편집자가 정해지지 않은 상태로 언제 세상에 나올지 가늠이 안 되는 불안한 상황 가운데 받은 제안이라 더욱더 감사한 마음이었다. 메일로 받은 기획안도 마음에 들어 성수동에 있는 사무실에 직접 방문해 출간 미팅을 가졌다. 솔직히 말해 미팅 자리에서 많이 놀란 것이 편집자가 상당히 어려보였다. 저절로 내 과거 사회 초년생 시절을 떠올리게 했고, 그래서 함께 작업을 한다면 더 흥미롭고 재밌는 것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들뜬 기대감을 갖게 되었다. 미팅을 마치고 편집자에게 샘플 원고를 보낸 며칠 뒤, 정리한 내용을 조금 더 발전시켜 보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러고 나서 이틀이 지났을까? 갑자기 출간을 진행하지 않겠다는 통보를 받았다.
황당했다. 출간이라는 건 매우 진지한 일이고, 먼저 제안을 한 입장에서 이틀만에 갑자기 변한 태도가 처음에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었다. 웬만큼 들어본 에세이를 만든 출판사인데, 어떻게 이렇게 작가에게 일방적으로, 그것도 메일로 통보를 할 수 있을까. 편집자가 보내온 내용의 요지는 출간을 결정하려면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 일치해야하는데, 그 부분에서 의견을 좁히는 못 했다는 거다. 미팅 중간에 갑자기 들어와 나에게 이것저것 물어봤던 편집자의 상사가 마음에 걸렸다. 나도 그리고 어린 편집자도 그 분의 마음에 충분한 감동을 일으키지 못했나보다. 뭐든 최종 결정권자의 마음에 들어야 하는데, 이번 건은 그 부분에 있어 실패했다. 일단 마음을 가다듬고, 받은 통보에 대한 회신을 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안녕하세요. 수진입니다.
연휴 지나서 전화드릴까 생각하다가 바로 회신을 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 메일 드립니다.
며칠 전만 해도 다시 기획안을 정리해 본다고 하셨다가 갑자기 함께하기 어렵다는 메일을 받게 되어 매우 유감스럽습니다. 그리고 일방적으로 통보받는 이 과정을 통해, 아 내가 아직 이 정도 취급 밖에 받을 수 없는 작가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던 게 사실입니다. 그 정도로 저는 실망이 매우 큰 상황이지만, 어렵게 메일을 쓰셨을 편집자님을 생각하며, 제 마음을 정리해 전달드립니다.
저는 독립출판을 통해 작가가 되었고, 지금은 그 콘텐츠를 가지고 강의를 하고 있어요. 그래서 반드시 출판사를 통해 책을 만들지 않아도 제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과 나누는 방법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출판사의 제의를 받고 응한 이유는 일단 저라는 사람을 리서치해서 기획안으로 만들어주신 편집자님의 마음이 참 좋았기 때문이에요.
저는 홍대에 있는 KT&G 상상마당 기획실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에 참 많은 작가와 아티스트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창작자가 가진 콘텐츠로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고, 가끔은 출판사와 연결해 책으로 엮는 기획자의 일이 참 즐거웠어요. 그래서 작가가 된 지금은 제 작품이 편집자 혹은 기획자에게 대표적인 포트폴리오가 되고, 결국엔 기획자와 작가가 함께 성장하는 것을 목표로 창작이라는 노동에 임하고 있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출판사와 작업한, 수수한 아이패드 드로잉은 취미 실용 분야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책을 담당한 편집자에게는 해외 판권 계약을 성사시킨 작품이 되었기 때문에, 저는 제 창작의 목표를 차근히 잘 이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커피를 사서 편집자님을 찾아갔던 이유도 제가 기획자를 대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서 그랬던 거예요. 편집자님과 함께하지 못하게 되어 우리가 같이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없어진 것 같아 매우 아쉽습니다.
아마 최종 결정권자의 결정에 따라 이렇게 된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이 더 큰 것 같습니다. 사회 초년생 시절, 기획안을 들고 팀장 앞에 갔을 때, 눈앞에서 박박 찢어 버려졌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과거 수많은 제 기획안이 무시당했고, 엎어졌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그 시절이 지금의 작가 수수진을 만들지 않았나 싶어요.
인생은 정말 지루할 정도로 길어서 우리도 언젠가 어딘가에서 또 만날 거라 생각합니다. 그간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다가 또 만납시다 : ) 제 작업을 알아봐 주시고, 또 응원까지 더해주셔서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즐거운 추석 보내시길 바라며,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수진 드림
예상한 대로 당연히 답장은 받지 못했다. 하지만 편집자에 대한 내 마음은 진심이었다. 일이 어떻게 되었든 내 글을 알아봐 준 사람에 대한 예의다. 이 과정을 겪으며 반드시 글을 연재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출간과는 별개로 글을 매개로 삶을 기록하는 것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일이다. 나는 이 아름다운 일을 꾸준히 하기 위해 나와의 약속을 한다. 누가 보든 보지 않든, 혹은 이걸 책으로 엮든 엮지 않든 나는 무조건 쓰는 사람이 되겠다고 스스로 약속하고 그 약속을 지킨다.
그림을 못 그리는 일러스트레이터라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글도 잘 못 쓰는 에세이스트다. 한 마디로 애매한 실력을 갖고 애매하게 작가 행세를 하고 있다. 그러니 이렇게 일이 어그러지고, 일방적으로 통보받는 일이 생기는 거다. 하지만 세상에는 애매하게 잘 하는 사람이 뛰어나게 잘 하는 사람보다 훨씬 많다. 그래서 나는 내가 가진 애매한 필력으로 충분히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 애매한 지점을 정확히 이해하는 우리는 바로 그 부분에 공감하며 서로를 위로하기 때문이다. 내가 가진 애매한 실력으로 꾸준하게 이 일을 해냄으로써 세상에 증명하고 싶다. 매사 뛰어나지 않아도 충분하다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