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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수진 Oct 30. 2021

삶을 쓰는 사람들


느슨하게 쓰던 글쓰기에 고삐를 잡게 된 계기 중 하나는 익산 출장이다. 익산 공공 미디어센터의 초대로 아이패드로 하는 독립출판 클래스를 진행했는데, 총 4회차 과정인데다 저녁 9시에 끝나는 일정이다 보니 서울 - 익산을 매일 왔다 갔다 하기는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미디어센터의 도움으로 유스호스텔에 머물며 낮에는 익산이라는 도시를 구경하고, 저녁에는 강의를 하며 2주간의 시간을 보냈다. 아버지 고향이 임실이라 전라도 문화는 꽤 익숙하다. 그리고 전라북도는 남도에 비해 사투리 억양이 거의 없어서 다른 지역에 왔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부산에 여행 갔을 때는 사람들의 억양이 달라 굉장히 신선했는데 거기에 비하면 전라북도 지역은 서울말과 거의 차이가 없다. 하지만 가장 큰 차이는 속도다. 익산역에 도착하자마자 에스컬레이터를 탔는데, 느려도 느려도 너무 느리다. 이거 움직이는 거 맞나 싶다. 성격이 급한 사람이라면 차라리 계단을 이용하는 게 나을 것 같다. 사람들도 전반적으로 매우 느리게 걷는다. 처음에는 시민 연령대가 높아서 그런가 했는데, 젊은 분들도 꽤 느리게 걷는 걸 봐서는 느린 속도가 이곳의 특징이 아닐까 싶다.


차가 없어서 이동은 주로 택시를 이용했는데, 여러 기사분들을 만났지만 대체로 말수가 적다. 내가 먼저 묻지 않는 이상은 아무 말씀도 안 하신다. 하지만 매우 친절하시고, 서울에서는 바쁘다 바빠 다음 손님을 받기 위해 분주히 떠나는 기사님들이 대부분이라면, 익산의 기사님들은 트렁크에 실은 캐리어까지 꼼꼼하게 챙겨 내려주시고, 내가 제대로 채비를 했는지 확인한 후 천천히 떠난다. 아마 이것이 익산에서만 누릴 수 있는 여유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이곳에서 지낸 2주간은 참 느긋하게 보냈다. 전체적으로 느리게 사니 이곳은 시간도 천천히 흐르는 것 같았다.


익산에서 만난 수강생은 평균 연령이 가장 높았다. 보통은 2~30대 여성분들이 찾아주시는데, 이번에는 5~60대 여성분들이 찾아주셨다. 아이패드로 하는 독립출판 클래스, 내가 운영하는 수업 중, 가장 최신 소프트웨어를 다루는 수업에서 우리 엄마 나이 또래의 수강생을 만나게 되다니 나도 당황했고, 수강생분들도 많이 당황하셨을 거다. 첫 번째 회차를 끝내고 기획자와 내가 느낀 지점이 비슷했다. 연령대가 있는 분들은 과정 자체가 너무 어려워서 두 번째 수업부터는 안 오시지 않을까... 그렇게 조심스레 서로의 걱정을 나눴다. 하지만 웬걸 그분들과 종강까지 함께했다. 단 한 명도 포기하지 않고 과제까지 다 해냈다. 수강생 중 한 분은 익산의 명물 고구마 빵 한 박스도 챙겨주셨다.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를 기다리며 빵 하나를 먹었는데, 쫄깃하면서도 달콤한 그 맛을 잊지 못한다. 지금도 익산의 수강생을 떠올리면 약간 소름이 돋는다. 그 정도로 그분들의 성실과 열심에 매우 큰 도전과 감동을 받았다.


자식을 낳아 기르며 사느라 바빠 자신을 돌볼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해, 지금에서라도 본인을 아끼고 사랑하는 방법으로 글쓰기를 택한 분들이었다. 사소한 깨달음이라도 열심히 기록하는 분들을 보며 굉장한 도전을 받았고, 강사의 입장이 아닌, 한 명의 인간으로서 나도 그분들의 행위에 동참하고 싶어졌다. 미디어센터의 섭외 메일을 받았을 때만 해도 이동 시간 대비 강사료 등 내가 얻을 수 있는 이익부터 계산했던 나다. 하지만 강사료는 둘째 치고 얻은 건 그 이상이다. 반짝이는 눈을 가지고 매 수업 시간마다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신 분들 덕분에 냉랭했던 창작에 다시 심폐소생술을 할 수 있었다. 늘 수강생을 통해 배운다. 열두 명의 아름다운 스승 덕분에 나도 지금의 삶을 쓴다. 우리는 함께 각자의 삶을 쓰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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