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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수진 Nov 12. 2021

이왕 21세기에 태어난 김에


'윌로'라는 웰니스 온라인 플랫폼에서 발행하는 뉴스레터의 인터뷰에 참여했다. 주제는 '나다움' 이었는데, 여러 가지 질문에 답하고 나니 오히려 더욱 '나다운 것'이 뭘까... 를 고민하게 되었다. 요즘 사람들은 '나답게 사는 것'에 굉장히 관심이 많다. 역사적으로 봤을 때, 개인, 즉 Individual이라는 용어는 15세기에 처음 사용되었고, 17세기가 되어서야 개인주의라는 개념을 통해 '개인'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역사가 짧은 개념 중 하나라 사회 이론에서는 아직도 연구가 활발한 분야이기도 하다. 우리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개인의 권리, 혹은 개성이라는 것도 15세기 전에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이렇게 생각하면 21세기에 사는 인류는 확실히 좀 더 나은 삶을 살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각자의 공간에서 매우 적극적으로 나답게 사는 것에 대해 고민하고 생각할 수 있으며, 나처럼 글로 정리하고 표현할 수도 있다.



인터뷰를 진행한 기획자는 "수수진 작가님은 진정으로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네요."라고 말했고, 나는 "아,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정말 감사드립니다."라고 답했다. 당신은 당신 자신답게 살고 있군요라는 말은 감사로 화답해야 할 21세기 최고의 칭찬이다. 이걸 반대로 15세기 전에 일어난 대화라고 상상해 보면, 자기 자신으로 산다는 말은 치명적인 욕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나는 시대를 잘 타고난 사람이다.



억지 '부캐'를 만들어 사는 사람들이 많은데, 나답게 산다는 건 부캐가 필요하지 않은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 직장에서의 부캐, 가정에서의 부캐, 얼굴을 덮는 가면과 부캐릭터없이 그냥 생김새 그래도 드러내놓고 내 얼굴로 사는 것, 그게 나답게 사는 삶이 아닐까. 하지만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한, 어떤 상황에서든 역할이 주어지기 마련이고, 그 역할을 잘 해내야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인정을 받는다. 나도 예술 강사일 때는 명랑하고 밝은 얼굴로 수강생을 대하고, 글을 다룰 때는 다소 냉랭해졌다가, 그림에서는 따뜻해진다. 하지만 여기서 구분해야 할 것은 내가 사회에서 취하는 모든 얼굴은 가면이 아닌, 내 모습이자 특징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본인이 어떤 상황에서 특정 행동을 했을 때, 그 행동이 본인이 가진 힘을 빼앗고, 지치게 하거나 극단적인 스트레스로 치닫게 한다면 그게 가면인 거다.



나답게 살기 위해서는 먼저 가면과 얼굴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가면은 결코 내 얼굴이 될 수 없다. 가면을 쓰면 이물감이 들고, 불편하다. 하물며 마스크만 써도 답답한데, 얼굴 전체를, 아니 삶 전체를 뭔가가 덮고 있는 기분은 상상만 해도 꺼림칙하다. 그렇다면 막상 가면을 벗었을 때, 진정한 얼굴로 과연 사람과 상황을 제대로 맞을 수 있을까? 그런 용기가 내게 있을까? 쉽지 않은 문제다. 우리가 보통 상상하는 '나다운 삶'은 마치 성격 드센 사람처럼 할 말 다 하는 모습을 떠올릴 때가 있는데, 실은 내가 생각하는 모습은 정 반대다. 할 말을 하고 못하고에 달린 게 아니라, 주어진 환경을 스스로 조정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나다움'이 결정된다. 상황을 조정할 수 있는 사람은 되려 해야 할 말을 아끼고, 스스로 차분하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그래서 나답게 살기 위해서는 결국 내 마음의 구석구석을, 또한 내 몸의 컨디션을 잘 알아야 한다. 그래야 어떤 상황과 환경에도 무너지지 않고, 모든 것 위에 올곧게 올라설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힘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과거 경험한 고통과 좌절, 어두운 시절을 통과하는 과정으로부터 나온다. 아니, 기껏 하는 말이 고통으로부터 배운다는 고리타분한 이야기라니. 스스로도 이런 소리를 해서 참 송구스러운 마음이지만, 이게 사실이다. 내가 삶을 다시 궤도에 올려놓게 된 계기는 모두 고통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고통의 과정은 내가 나다워지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기도 했다. 내가 억지로 쓰고 있던, 혹은 쓰고자 했던 여러 모양의 가면도 고통을 통해 모두 천천히 벗겨졌다(일부는 의지와 반하게 억지로 벗겨진 것도 있다). 진정한 내 얼굴이 떡하니 드러났을 때 그제서야 밝은 눈으로, 넓은 시야로 사람과 상황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그 고통은 이별의 형태일 때도 있었고, 육체의 아픔일 때도 있었고, 실패의 경험일 때도 있었다. 각종 형태의 아픔과 고통이 쌓이고 쌓여 나를 나답게 만들었다. 인류의 역사에서 죽음이 해결되지 않는 한, 누구나 고통을 겪는다. 고통이야말로 모두에게 평등하게 주어지기 때문에 나는 이 단순한 사실로부터 나다움을 이야기하고 싶다. 즐겁게 취미 생활을 하면서,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을 만나서 나다움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 나도 마음이 편할 것 같다. 하지만 그건 나를 찾는 과정이라기보다는 즐거움을 찾는 과정인 것 같다. 물론 인생에서는 이 또한 매우 중요하다.



수영 강습을 받은 어느 날, 자유형 10바퀴를 돌라는 선생님의 지시가 있었다. 250m 수영장을 왕복으로 왔다 갔다 하면, 총 500m가 한 바퀴인데, 이걸 10바퀴 하면, 5000m 자유형이 된다. 엄청난 길이인 것 같지만 방법은 간단하다. 중간에 힘들어도 절대 쉬지 않고 완주하는 게 바로 요령이다. 중간에 쉬면, 리듬과 호흡이 깨져서 오히려 완주하기가 더 힘들다. 수영을 하다 보면, 초반에는 숨이 가쁘고 팔다리가 떨어져 나갈 것 같은 기분이 들다가도 4~5바퀴 정도가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물속에서의 호흡이 안정적으로 변하고, 익숙해진다.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라는 말이 있는데, 매우 비슷한 느낌이다. 스위머스 하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어쨌든 지독하게 힘든 구간만 지나면 그다음은 수월하게 10바퀴 이상 수영할 수 있다. 가장 힘든 4번째 바퀴를 겨우 돌고 있는 사람에게 삶은 누구나 힘든 거니까 받아들이라거나, 고난의 시기가 앞으로 삶의 자양분이 될 거라는 뻔한 위로는 정말 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고통의 시기는 나답게 사는 방식을 차분히 발견할 수 있는 보물 같은 시간인 건 확실하다. 꼭 누구나 나답게 살 필요는 없지만, 나답게 사는 삶에 높은 가치가 부여되는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다. 이왕 21세기에 태어난 김에, 나답게 한 번 살아보면 어떨까. 21세기 성공한 인간형은 집도 절도 없어도 한번 사는 인생 나답게 살다간 인생이다.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큼은 내가 확실하게 보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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