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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수진 Jan 28. 2022

창문 하나 갖기가 이리도 어려워서야


작업실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데 주차가 안 되는 바람에 이사를 하게 되었다. 원래 작업실 건물에 주차장이 있어서 미리 주인 할머니에게 이야기를 해뒀는데, 차를 알아보는 과정이 이렇게 길어질 줄은 차마 몰랐고, 그 사이에 다른 사람이 주차장을 선점하면서 일이 제대로 꼬여버렸다. 어쨌든 주차도 문제이지만, 5평 남짓의 지금 공간은 작아도 너무 작아서, 이렇게 된 김에 조금 넓은 작업실을 구하는 걸로 결정하고 본격적으로 부동산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기본값이 낙천적이라 이번에도 큰 어려움 없이 공간을 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살면서 작업하고 있는 이 공간은 딱 하루 발품 팔고 찾았다. 물론 한 여섯 개 정도의 매물을 본 결과이긴 한데, 어쨌든 하루의 시간을 내서 열심히 보러 다니면 금세 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과거의 경험은 이미 과거일 뿐, 부동산 값이 천정부지로 오른 지금은 5평짜리 작은 원룸 하나를 구하는 것도 매우 힘든 일이 되어버렸다. 주말 내내 발품 팔아 방을 봤지만 도저히 괜찮은 공간을 찾지 못했다.


원룸을 보러 다니면서 가장 서글픈 게 뭐냐면, 건물이 너무 가까이 붙어있다 보니 프라이버시를 위해 창문 밖에 희뿌연 플라스틱 커버를 씌워 놓는 것이다. 그래서 창문이 창문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창문을 열자마자 옆집이 보이는 건 당연히 불편한 일이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건 더욱 불편한 일이다. 요즘도 밥 먹을 때마다 배경으로 틀어 놓는 미국 시트콤 <프렌즈>에서는 맨해튼의 아파트에 사는 여섯 청춘의 이야기를 유머 있게 풀어내는데, 함께 세 들어 사는 친구들 사이에 벌어지는 다양한 에피소드가 재밌고 정스럽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어서 이렇게까지 설명할 필요가 있을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극 중 캐릭터인 조이의 집 또한, 옆 건물과 상당히 가까워서 매일 아침 창밖에 보이는 옆집의 남자와 인사를 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그뿐만 아니라 앞 건물에는 늘 벌거벗고 생활하는 남자가 사는데, 프렌즈의 친구들은 그를 Ugly naked man이라 부르며 우스꽝스럽게 놀리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그만큼 대도시의 건물은 서로의 프라이버시가 지켜지기 어려울 정도로 과도한 밀도를 자랑한다. 서울도 마찬가지다. 이 부분을 어떻게든 해결하고자 창문 바깥에 플라스틱 커버를 씌워서 서로의 공간이 관찰 대상이 되지 않도록 보호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커버가 너무 안쓰럽고 서글프다. 5평의 공간 자체가 너무 좁고 답답한데, 창문까지 막혀있다. 이런 환경에서 삶의 질을 논하기도 사치스러운데, 반면 가격은 놀랍도록 사치스럽다. 전세가 1억 5천. 몸 하나 겨우 뉠 수 있는 공간이 전세로 1억 5천, 아니 그 정도면 괜찮은 시세인 거고, 사실 더 비싼 곳도 많다.


서울의 청춘이 고단한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그게 비록 옆 건물 벽일지라도 바깥을 바라볼 수 있는 창문 하나 갖지 못하는 현실. 이 현실이 서울의 청춘을 고달프게 만든다. 도시란 자고로 꿈꿀 수 있는 터전이어야 하는데, 꿈을 갖기에는 도시의 부동산도 물가도 너무 비싸다. 꿈의 값이 너무 비싸서 사치스럽다. 사치스럽고 새삼스럽다. 그래서 꿈을 고이 접는다. 아니, 꿈이라는 게 대체 뭐지? 아예 깡그리 잊어버리고 그냥 매일의 현실을 기계처럼 살아낸다. 가끔 저녁에 맥주 한 캔으로 마무리하면 그냥 대충 잘 산 것 같은 기분이 들게 만드는 도시, 이런 도시는 뭔가 잘 못 되었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인생은 원래 그런 거라고? 도대체 누가 그런 걸 인생이라고 정의하기 시작한 거냐고 제대로 한 번 따져 묻고 싶다.


창문 하나 갖기가 이리도 어려운 도시의 삶은,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다. 인류 역사상 '땅'이 한 번이라도 '삶'을 위해 제대로 존재할 수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 같다. 하지만 땅은 늘 욕망의 대상이다. 그래서 그 욕망에 빈틈없이 건물을 올리고, 세를 놓고, 돈을 벌고 또 새로운 건물을 올리고, 세를 놓고, 돈을 벌어 또 건물을 올린다. 삶을 위한 집이 아니라 집을 위한 삶을 사는 욕망 덩어리들과 그 결과 변두리로 계속해서 밀려나는 청춘들. 지극히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것이 상식이 아닌 '이상'이 되어버렸다. 보통의 병든 사회가 대부분 이런 모습을 하고 있다. 나는 의사가 아니라서 병을 진단하거나 고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래서 더 서글프지만, 그저 통곡하며 아무 잘못도 없는 방바닥만 때리고 앉아있을 게 아니라, 잘못된 걸 잘못되었다고 적극적으로 말하고 싶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 언젠가는 병든 사회가 스스로 아픔을 자각하고 "나... 혹시 병원 가봐야 하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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