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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수진 Feb 04. 2022

청년을 위한 나라는 없다

마음고생, 몸 고생 끝에 작업실 계약을 마쳤다. 부모님 댁에 가까워 일과 삶의 균형도 챙길 수 있을 것 같고, 주차장도 쓸 수 있다. 작은 응접실도 있어서 클라이언트를 모셔다 간단한 다과나 미팅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앞으로 새로운 작업실에서의 생활이 기대된다. 물론 여전히 매우 작은 공간이지만, 워낙 어렵게 구한 공간이다보니 그저 감사한 마음이다. 이사를 결정한 이유는 지난 글에서 밝힌 바 있는데, 주차 문제 때문이다. 주변 친구들에게 주차 때문에 이사를 한다고 하면, 다들 의아한 표정을 짓는데, 나 또한 주차 공간을 구하는 게 이리도 어려운 일인 줄 몰랐고, 도시의 삶이 팍팍하다는 건 익히 들은 바 있지만 겪고 나니 이 정도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역시 사람은 경험을 해야 아는가 보다. 5평짜리 작업실을 구하는 것도 보통 어려운 게 아닌데, 자동차 하나 둘 수 있는 자리를 구하는 건 더 어렵고 치열하다. 거주자 우선 주차 구역 신청은 모든 조건 상 1순위인데도 정기 모집, 수시 모집 모두 탈락했다. 그러니까 서울에서 '공간'을 갖는다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 살았고, 도시를 벗어나는 게 딱히 선택지인 적은 없었다. 부모님도 동생네도, 친구들도 내가 의지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이 서울에 있기 때문에 다른 장소에서 생활하는 건 아예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최근 주차 문제와 주거 문제를 겪으면서 몸과 마음이 많이 지쳤다. 서울을 떠나 멀리 타지역으로 이동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고, 아무 연고도 없는 곳으로 떠나는, 쉽지 않은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는 상황을 비슷하게 겪으면서 나도 그냥 훌쩍 외지로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나? 보통 도시에는 젊은 사람들이 열심히 살면서 각자의 꿈을 꿔야 하는데, 실제로 뚜껑을 열어보면 나이 많은 어른들이 건물의 꼭대기 층에 살면서 2,30대에게 월세를 받아먹으며 건물의 융자를 갚으며 삶을 유지한다. 살고 있는 관악구의 대부분의 원룸 건물이 그렇다. 물론 나는 주인 할머니와의 관계가 좋은 편이고, 내가 월세를 내는 한 나의 공간이라 생각하지만, 어쨌든 원룸의 생태계에 발을 디딘 후, 이 생태계의 기괴함을 매일같이 경험하고 있다.


오늘은 열심히 그림 작업을 하고 있는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작업실 옆 건물 사장님이다. 차를 왜 허락도 없이 세웠냐며 대뜸 주차비를 내놓으라고 소리를 지른다. 불법 주차를 한 것도 아니고, 전에 전화해서 이러저러한 사정이 있어 살고 있는 건물에는 주차를 못 하니, 사장님 건물에 월 주차비를 내고 사용할 수 있는지 정중히 여쭤봤었다. 거기에는 주차 자리가 늘 있길래 제발 좀 부탁드린다고 여러 번 사정을 이야기했는데 무슨 이유에선지 안된다고 엄포를 놓으셨다. 우리 건물주 할머니에게 여쭤보니 지독한 사람이라며 웬만하면 옆 건물 사장과는 엮이지 말란다. 창문에 가림판을 설치할 정도로 서로 가까운 위치에 있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사이가 안 좋다. 그래서 옆 세입자에게는 자리가 있어도 주차 자리를 내주지 않으신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나도 웬만하면 잠깐이라도 주차는 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늘 주차하는 장소를 다른 사람이 사용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세울 수 밖에 없었다.


사장님의 전화가 더 놀라웠던 건 주차장이 텅 - 비어있고, 내 차만 한 대 덩그러니 세워져있다. 그런데도 차 빼라고, 주차비 내놓으라고 소리 소리를 지르신다. 주차비는 당연히 드릴 건데, 좀 서운하다 했더니 다른 소리 하지 말고 주차비나 내란다. 듣다듣다 너무 화가 나서 말했다. "정말 너무 하시네요." 주차비 2만원을 입금했지만 더 이상 거기에 주차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여전히 내 차 한 대만 덩그러니 세워져있다. 하지만 시동을 걸어 저 멀리 다른 곳에 세워놓고 한참을 집에 걸어왔다. 서러운 마음이 들었다.



관악구는 원룸촌이다. 서울의 많은 대학생과 직장인이 이곳에 모여 살아간다. 내가 이곳을 선택한 이유도 원룸이 많이 모여있다 보니 다른 지역에 비해 월세가 저렴한 편이기 때문인데, 그래서 이 지역에는 젊은 사람들이 많지만 동시에 원주민인 노인 인구도 많다. 그중 많은 노인들은 건물주인데, 하나도 멋지지가 않다. 관악구는 노인들이 파릇파릇한 청년들의 삥을 뜯으며 산다. 치열하게 살아 겨우겨우 쥐어짜 나오는 청년들의 돈을 받아 가면서 그들은 과연 행복할까? 스스로의 삶을 돌이켜봤을 때 잘 산 인생이라고 과연 말할 수 있을까? 물론 모든 주인이 그런 건 아니고(우리 주인집 할머니는 따뜻하시다), 또한 부동산 시장에서 공급자의 역할 또한 중요하기 때문에 결코 그들을 욕보일 생각은 없다. 하지만 오늘 전화로 다짜고짜 난리를 치신 관악구 쑥고개로 건물주는 온몸과 마음을 다해 욕하고 싶다. 어떤 이웃 간의 정도 경험하지 못 한 채, 혹은 본인 스스로 보이지 않는 담을 켜켜하고 단단하게 쌓아 쓸쓸하게 살아가는 분. 어린 사람들 삥 뜯어 먹으면서, 엘리베이터도 작동하지 않는 지저분한 건물 꼭대기 층에 살며 남은 생을 겨우겨우 멱살 잡혀 살아가다가 짜게 한 줌의 재가 될 그런 인간.



내 나이가 그 어른의 나이가 되었을 때 존경까지는 아니더라도 청년들에게 적어도 욕 먹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한 청년이 분을 이기지 못해 글을 남겨야만 하는 경험을 하게는 않을 거다. 내가 그 나이에 뭘 하고 있을지는 상상도 안 되지만, 어릴 때 화가가 되고 싶었던 어린이가 청년이 되어 그 꿈을 이룬 것처럼, 청년인 지금 노년의 꿈을 꿔본다. 만약 건물이 있다면 꿈꾸는 청년들에게 마음껏 나눠주는 어른이 되고 싶다. 벽돌 한 장도 가져갈 수 없는 죽음이라는 존재 앞에서, 늘 겸손한 마음으로 뭐라도 하나 더 나누는 삶, 그래서 앞으로 자라날 청년이 마음껏 꿈을 꾸고 그 꿈을 이뤄 내가 청년의 시절에 경험한 '성취감'의 아름다움을 맛볼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 잘 산 삶이 있을까? 옆 건물 사장의 반대로만 한다면 충분히 이룰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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