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과 인연 사이
*본 글은 필자의 주관적인 감상을 담고 있습니다.
살다보면 정말 신기한 우연을 경험하기도 하고, 잡고 싶은 인연을 만나기도 한다. 나에게만 놀라운 것이 아닌 우연과 낯가리는 내가 먼저 적극적으로 들이댈 만큼 끌리는 인연 모두 흔하게 있는 일은 분명 아닌데 일상에서 벗어난 공간이어서일까. 여행길에서는 유독 우연도, 인연도 잦다.
가장 최근에 떠났던 유럽 여행은 두 달이라는 긴 여정이었던 만큼 경험한 우연도, 인연도 남달랐는데 공교롭게도 양 쪽 모두를 독일에서 만났다. 여행 내내, 그리고 여행이 끝나고도 함께해준 프랑크푸르트의 취향메이트와 즐거운 반나절을 선사해준 베를린의 토마스. 내가 다녀온 동유럽 10개국 중 독일이 가장 좋았던 건 두 사람 덕분일지도 모르겠다.
앞서 말했듯이 여행에서 만난 우연과는_국적과 관계없이_따로 연락처나 sns 주소를 주고받는 일 없이 그 날을 즐기고 쿨하게 헤어지려 하고 있다. 일상으로 돌아와 그들의 일상을 지속적으로 지켜보고 응원할 만큼의 여력도 없을 뿐 아니라 그냥 '그 땐 그랬지' 정도로 남겨두는 게 가장 좋은 결말 같아서.
베를린에서 묵던 호스텔의 룸메이트였던 토마스를 만난 건 뮤지엄 투어 중이었다. 베를린의 뮤지엄 패스는 3일간 제휴를 맺은 모든 뮤지엄들의 자율입장권이었는데, 그 날은 패스 마지막 날이라 한 곳이라도 더 보겠다며 저녁도 미룬 채 가장 늦게까지 운영하는_그래봐야 8시까지였지만_스파이 박물관으로 향했다. 어린이들이 즐기며 배울 수 있도록 만들어진 체험형 박물관이라 여기저기 직접 해 볼 수 있는 게 많았는데 1층에는 모스 부호로 이름을 보내보는 체험이 있었다. 이런 걸 보면 또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어른이는_모스부호 이름 프린트도 해준다는데!_열심히 이름을 보내고 있었는데 갑자기 뒤에서 웬 백인 남자가 그게 네 이름이냐고 물어봤다. 여행 시작과 동시에 스몰토크를 빙자한 캣콜링과 작업을 경험한지라 잔뜩 경계한 채로 삐딱하게 쳐다보기만 하니 이번엔 내가 묵고 있는 호스텔 이름을 말한다? 이쯤되니 조금 무서워지는 지경이라 태도는 절로 더 삐딱해졌다. 그러자 다급하게 이상한 사람 아니라고, 내가 묵고 있는 호스텔에 오늘 체크인한 룸메이트인데 이름이 특이해서 외웠다며, 신기해서 말을 걸었다며 변명하고는 함께 있던 친구들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본인은 독일인이라며 같이 다닐래? 하는 토마스가 이상한 사람 같지는 않았지만 동행 권유는 1층을 다 보려면 오래 걸릴 것 같다며 정중히 거부했고, 친구들은 인사를 하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다시 설명을 읽는 데에 집중하는데 토마스가 슬금슬금 다시 내려오더니 쭈뼛쭈뼛 주위를 맴돌았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쳐다보니 갑자기 사실 본인이 다른 두 친구를 썸타게 엮어줘서 사이에 껴 있기가 불편하다며 고해성사를 해왔다. 조용히 기다리겠다며, 불편하면 다른 쪽에 가 있을테니 함께 다녀주면 안되겠냐는 간절한 부탁은 웃기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해서 결국은 동행을 승낙했다. 첫 만남은 당황스럽고 수상쩍은 룸메였지만 워낙 좋은 성격 덕분에 금방 친해진 토마스와는 박물관 관람 후 저녁식사까지 함께했다. 각자의 전공부터 여행 계획, 소소한 일상 이야기까지 친한 친구랑 이야기하듯 편하고 자연스러운 동행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다른 도시로의 이동을 해야 했던 나는 별다른 인사도 하지 못하고 체크아웃을 했다. 별다른 연락처를 주고받거나 하지는 않았으니 당연히 연락할 방법도 없다. 하나도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연락처를 알고도 하지 않을 바에는 그 편이 차라리 좋다. 즐거운 기억이 퇴색되지 않았으니 만족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