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박 64일, 최애도시
*본 글은 필자의 주관적인 감상을 담고 있습니다.
2019년 가을부터 초겨울까지, 63박 64일이라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여행 동안 방문한 35개나 되는 도시 중 독보적인 최애도시로 등극한 베를린. 가장 가보고 싶었던 여행 막바지의 세 도시_부다페스트, 빈, 프라하_를 제외하면 가장 길게 계획했지만 4박 5일로 베를린을 만끽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해 보면 좋겠다 정도로만 생각했던 한 달 살기에 대한 의지를 남긴 채 발을 옮길 수 밖에 없었던. 사랑해, 베를린.
혼자 떠나는 장기여행, 낯선 대륙, 호스텔과 한인 민박. 하나부터 열까지 새로운 도전이었던 동유럽 여행에서 가장 기대했던 것들 중 하나는 바로 난생 처음 타국에서 맞이하는 생일이었다. 아주 어렸을 때라면 모를까, 중학생이 된 후로는 한결같이 시험 기간에 걸리고, 가끔은 명절에 겹치기도 했던 생일날을 특별하게 보낼 수는 없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생각도 없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낯선 곳에서 혼자 맞이할 생일은 조금 특별했으면 했다. 가진 돈이 많지 않아 주로 저렴한 호스텔의 6인실이나 8인실, 심지어는 10인실을 예약했지만 그날만큼은 저렴하지만 깔끔한 호텔을 예약했고, 생일날만큼은 꼭 맛있는 음식을 먹겠다는 의지로 맛집도 열심히 찾았다. 완벽히 혼자 맞이하는 생일은 처음이지만 무조건 즐겁고 행복한 날이 되어야 한다고 다짐했던 것도 같다.
여행은 즐거웠고 순탄했다. 좋은 사람들을 만났고, 처음 보는 사람들과도 소소한 대화를 나눠보았으며, 책에서 보던 것들을 눈으로 보며 잔뜩 들떴다. 생일 전날까지는. 이후의 다른 글로 다루겠지만, 생일 전날 도착한 라이프치히에서는 유독 운이 따르지 않았다. 정말이지, 운이, 없었다. 착잡하게 돌아왔지만 조금 이른_한국에서는 생일이었지만 독일에서는 아직 생일이 아니었던 시간의_생일 축하를 지인들로부터 받으며 일찍 잠자리에 들었고, 상쾌한 내일을 꿈꿨다.
그리고 생일. 베를린으로 이동하는 날. 침대에서 일어나 아무 생각 없이 가려운 발목을 긁었다. 뭔가에 물린 듯 발목 여기저기가 붉게 부풀어있었다. 혹시 베드버그인가. 겁을 집어먹고 돌린 눈에 베드버그처럼 생긴 벌레가 보였고, 패닉이 시작됐다. 호스텔 측에서는 베드버그는 아닌 것 같지만 맞을 수도 있으니 환불을 해주겠다 먼저 선뜻 말해주었지만 마음은 쉬이 진정되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베를린으로 가는 열차를 타고서야 조금쯤 안도할 수 있었다. 도망가는 느낌이었다. 시작부터 엉망이 되어버린 생일날은 계획과는 정말 달랐다. 맛집은커녕 하루종일 쫄쫄 굶다 케밥집에서 사먹은 도너박스(케밥 재료들을 박스에 담아놓은 것) 한 개가 식사의 전부였고, 빨래방에 앉아 짐들이 소독되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렸다. 좋을 틈조차 없는, 정신없는 첫만남이었다.
전날의 소동을 마무리하고 본격적으로 베를린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여유가 생기니 그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도시의 모습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제대로 마주한 베를린은 서울과도 같은 도시였다. 큰길가의 번화한 쇼핑가와 한적한 주거지역의 작고 아기자기한 골목, 각종 박물관이 공존하고 바쁜 직장인들과 여유로운 주민들, 관광객들이 걸어다니는 베를린은 이국적인 풍경만 제외한다면 정말 익숙한 느낌이었다. 시골길보다는 도시의 골목길을 좋아하고, 박물관을 사랑하는 서울 토박이_그것도 서울을 좋아하는_가 베를린과 사랑에 빠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어찌보면 빠듯하기도 한 일정이지만 먼 거리_대중교통으로 1시간이나 걸리는 이동을 하기도 했다_가 아니라면 무조건 걸어다니는 방법을 택했다. 타인을 신경쓰지 않고 부지런히 움직이고, 마음에 드는 곳을 발견하면 잠시 앉아 지켜보고, 언제든 카메라를 꺼내 순간을 간직할 수 있는 건 혼행_혼자 여행을 줄여서 이렇게들 부르더라_의 특권이었다. 천천히, 때로는 빠르게 걸어다니며 베를린의 구석구석을 발견하는 일이 즐거웠다. 프라이마크에서 단돈 2유로도 안되는 가격에 깜빡하고 놓고 온 벨트를 득템하고, spicy 를 콕 찝어서 주문했지만 전혀 맵지 않은 우육면을 먹고, 춥고 배고프면 카페로 피신해 따뜻한 카푸치노와 당근케이크_처음 먹어보고 여행내내 먹게 된_로 허기를 달래며 베를린을 누볐다. 낯선 도시 속에서 낯익은 풍경을 발견하며 익숙한 곳인 양 지도도 보지 않고 걸어다닌 4박 5일 끝에 베를린은 그렇게 최애도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