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고 강렬했던 1박 1일
*본 글은 필자의 주관적인 감상을 담고 있습니다.
계획 없이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 겁쟁이는 해외여행을 가기 전에는 항상 여행지에 대해 많이 알아보고, 소소한 것들까지도 촘촘하게 계획을 짜려 노력한다. 그 노력이 정점을 찍었던 것이 2019년의 동유럽 여행이었다. 처음 가보는 혼행, 처음 가보는 유럽 여행, 처음 가보는 장기 여행. 하나부터 열까지 익숙한 것이 하나 없었기에 더 신중해졌다. 그러다 보니 늦어도 1달, 빠르면 3달 전부터 63박 64일의 모든 숙소와 교통편을 미리 예약해버리게 됐다.
숙소와 교통편이 정해져 있다 보니 여행은 딱 일정만큼만으로 흘러갔다. 덕분에 계획했던 도시들을 전부 둘러볼 수 있었지만 마음대로 일정을 늘리거나 줄일 수도 없었다. 여자 혼자 장기간 여행을, 그것도 우리나라 여행객들이 잘 가지 않는 지역까지 여행을 하면서도 안전히 다녀올 수 있었기에 그 정도의 아쉬움은 감수해야만 했지만 그래도 가장 아쉬웠던 순간을 뽑자면, 베오그라드에서의 강렬한 1박 1일이 아닐까 싶다.
세르비아. 내전이라는 단어를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이 나라의 수도인 베오그라드는 순전히 크로아티아에서 불가리아로 넘어가기 위한 관문과도 같았다. 내전의 여파로부터 완전히 복구되지 못한 나라, 주위의 그 누구도 여행을 다녀왔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 미지의 나라. 내전이 일어나던 시기의 세르비아를 기억하던 부모님의 걱정과 반대가 여행을 준비하는 내내 이어졌고, 비슷한 시기에 베오그라드에 머무르던 모 블로거의 글에서 우려와는 다른 안전한 곳임을 확인했음에도 기대는커녕 조금은 두려웠던 것 같다.
베오그라드로 향하는 버스에서 두려움은 점점 고조됐다. 수도에 슬슬 들어서고 있음에도 군데군데 있는 건물들에는 검게 그슬린 자국이 그대로 남아있었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이 아슬하기만 해 보이는 건물들에는 어울리지 않게도 새 간판을 단 가게들과 사무실들의 불이 들어와 있었다. 무엇보다도, 세르비아에서는 여태껏 사용하던 유심이 터지지 않았다. 꽤 오래 머무른 도시들에서도 데이터가 터지지 않으면 긴장하게 되는데 처음 가 보는 곳에서 데이터도, 전화도 되지 않다니. 낯선 곳에 대한 두려움이 극에 달하는 찍는 조건이 아닐 리 없었다. 와이파이가 터지는 숙소까지는 다운받아놓은 구글맵_혹시 몰라서 경로 캡쳐까지 해 놓은_에 의지해야만 한다는 것도 걱정인데 터미널 앞쪽은 대공사 중이고, 방향도 이게 맞는지 도통 알 방법이 없었다. 그저 감에 의지해 방향을 잡고, 현지인들이 동물원 속 원숭이를 보듯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오르막을 낑낑대며 오르고, 도시 곳곳의 공사 현장을 피하고, 노숙자들이 가득한 엄청나게 노후한 파칭코(이게 맞는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도박장으로 보이는 곳들이 입구부터 즐비했다) 골목을 지나고서야 겨우 호텔에 도착할 수 있었다.
베오그라드에서의 1박은 드물게도 호텔을 예약했다. 직전 도시인 두브로브니크에서 출발해 베오그라드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한 번의 환승을 거쳐 버스 안에서만 대략 15시간이나 있어야만 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안 그래도 위험한 인상이 강했던 세르비아에서 호스텔은 절대 안 된다는 어머니의 당부가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도착해보니 웬일이람. 허름한 입구만 빼면 깔끔하고 고급진 인테리어의 호텔인데 룸을 업그레이드받기까지 했다. 널찍한 소파와 킹사이즈 침대가 들어가고도 한참 공간이 남는, 넓고 큼지막한 방에서의 하룻밤 선물이었다. 여기까지만 해도 여행길에서 누릴 수 있는 충분한 소확행인데 심지어 베오그라드는 물가도 저렴하다. 덕분에 환전은 얼마 하지도 않았음에도 모 블로거가 추천한 베오그라드 젤라또 맛집 세 곳 모두에서 젤라또를 세 스쿱씩이나 먹고 꽤나 핫플로 보이는 레스토랑에서 오랜만에 짜지 않은 음식까지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다. 불이 환하고 행인도 많아 편안하기까지 한 밤거리를 지나 호텔로 돌아와 샤워할 때 사용한 좋은 향의 어메니티_너무 좋았어서 집에 와서 찾아보기까지 했다. The White Company라는 회사의 Noir 라인이었다_까지, 1박뿐이라는 사실이 너무 아쉬울 정도로 힐링 가득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