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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벤더핑크 Oct 23. 2021

제주도 첫째 날, 불협화음 조율 중

[1악장] 하이든 교향곡 제94번 '놀람'

  천지연, 정방폭포 등 두 사람 다 모두 가본 흔한 코스는 사뿐히 제치고 닭머르 해안으로 향한다. 여행사에서 흔히 가는 관광코스는 피하고 이번 여행은 좀 더 Young 하고 힙한 코스 위주로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엄마가 절대 여행사나 친구와 함께 올 수 없을 법한 물리치료 선생님이 보내주신 인스타 사진 찍기 좋은 코스로 제주도 일주를 해보기로 했다. 동쪽에서 남쪽을 거쳐 서쪽까지 훑어볼 수 있는 시계 방향으로 돌아볼 예정이다.


제주도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정갈한 검은빛이다.


   닭머르 해안으로 가보는 길 눈에 띄는 것은 현무암 돌하르방, 돌담뿐 아니라 밭의 흙까지 검은 정갈한 흑빛이었다. 제주도 하면 흔히 감귤 빛깔이 떠오르지만, 해안으로 길을 가고 있던 나에게는 오히려 정갈한 검은색이 먼저 와닿았다. 닭머르 해안에 다다르자 이번 여행에서 처음으로 본 바다 풍경은 정갈한 검은색이 잔디의 초록빛과 푸른 바다 물빛에 어우러져 오랜만에 다시 봐도 놀라웠다. 이른 시간에도 불구하고, 잘 차려입은 젊은이들이 인스타 갬성으로 사진을 연신 찍어대고 있다.

그나마 건질 사진이라 생각하면 손가락으로 살포시 가려주심

   그 대열에 합류하고자 엄마에게 사진을 맡기지만, 배경이 아닌 반드시 인물이 중심이 되어야 하는 아메리칸 스타일로 사진을 찍으시는 우리 엄마는 내가 뒤를 돌아보며 브이를 하며 뒷모습을 들이대자, "앞을 찍어야지. 뒤를 뭐하러 찍노." 하신다. 사진 몇 장 찍는데 한참을 걸려 찍은 사진을 확인해보니, 좋은 각도와 구도를 무시한 건 필수, 삐뚠 사진은 애교요, 얼굴이 크게 나오도록 가까이서 찍는 건 기본, 주변 좋은 경치를 다 잘라내시고 인물이 정중앙에 들어온 전형적인 미국식 사진들이다. 사진을 잘 못 찍는 내 눈에도 이건 아니다 싶은 사진들을 보고 흠칫 놀란 나는 찍을 위치를 아예 정해주고 이런 구도로 찍어달라 요청한다. 그렇지만, 여전히 말뚝으로 나를 반쯤 가려놓거나, 애써 바꾼 포즈를 아예 찍어 놓지 않거나, 브이 표시를 한 내 손목을 다 잘라 버리거나, 큰 바위 얼굴의 짜리 몽땅 사이즈로 찍거나, 100장 연속 촬영을 해놓거나, 그도 아니면 찍는 손이 흔들렸거나, 그마저도 아니면 아예 손가락으로 카메라 구멍을 가려놓았다.


  높은 음자리표로 엄마를 부르며 재차 사진 찍기를 시도하던 나는 그만 이번 여행에서 사진은 그냥 포기하기로 하고 다음 코스인 카페 델문도로 향한다.

   맑은 하늘과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이국적 휴양지와 같았던 카페는 엄마도 무척 좋다며 만족스러워하신다. 나도 기존 제주도 여행에서 매번 함덕은 빼놓았고 중문으로만 향했는데, 기존에 맛보지 못했던 의외로 그림 같은 이국적 정취에 함덕이 이런 곳이었나 하고 한차례 놀랐다. 당 충전을 마치자마자, 붐비는 카페를 벗어나 카페 옆으로 사람들이 줄지어 향하던 산책로를 따라가 본다.

   바다 빛이 너무 예뻐 그만 내려놓은 줄로만 알았던 사진 욕심이 다시 올라오는데, 내가 사진 찍음을 좋아하는 걸 아는 엄마는 그 마음을 읽었는지 내게 여기저기 서보라 권한다. 엄마의 사진 찍기는 온음표이다. 평소 8분 혹은 16분 음표에 익숙한 나는 이제 같은 포즈를 취하고 속으로 하나, 둘, 셋, 넷까지 센 후 포즈를 바뀌어야 그제야 포즈에 맞게 찰칵 소리가 제때 난다. 그냥 막 아무 데나 여러 장 찍어 놓으면 내가 알아서 고르겠다 얘기 하지만, 한 장 한 장 혼신을 다해 구도를 고심하며 찍어 주시는 덕분에 속으로 매번 온음표를 세야 했고 사진 찍는 시간은 평소보다 길기만 했다. 그렇지만, 역시나 건질 사진은 극소수다.


  점심때가 되자 근처 김밥집으로 향했다. 코로나 때문에 나름 맛집으로 유명해 번잡한 식당 안 인파를 피해 포장해와서 근처 함덕 해수욕장 정자에 앉아 피크닉 기분으로 먹었다. 딱새우 김밥은 새콤달콤하고, 해녀 김밥은 매콤한데 전복 김밥은 버터향 맛이라 세 김밥을 돌아가며 맛보면 조화가 딱 맞다. 남은 김밥은 준비해온 천 아이스 가방에 넣어 배고플 때 비상용 혹은 내일 아침으로 남겨두기 좋았다.

김밥집 창문에 쓰여진 힘을 주는 좋은 글귀들
알록달록 예쁜 딱새우김밥, 해녀김밥, 전복김밥

 

   비록 김밥이지만 푸짐하게 먹은 덕에 소화도 시킬 겸 바로 옆 서우봉을 향한다. 제주도는 올레길이나 산책길이 평탄하고 잘 다져져 있어서 엄마나 나 같은 환자가 걷기에 안성맞춤이었다. 푸른 바다 풍경의 초원에 풀을 뜯고 있는 말의 모습은 무척 제주도스러웠다. 엄마는 맑은 공기 마시면서 걸으니 피곤한 줄 모르겠다 하신다.


그 다음은 휴식을 위해 다시 카페.

무려 화장실 비주얼

 

   카페 모알보알의 히피즘적이며, 동남아의 이국적 감성을 가득 담은 이 카페를 우리 엄마는 좋긴 한데, 좀 지저분해 보인다라 표현한다. 아마도 새하얀 인테리어의 깔끔함을 선호하는 우리 엄마 눈에 이것저것 주렁주렁 장식이 많이 달린 카페를 그렇게 표현했나 보다. 야외에 피아노와 욕조, 침대가 있어 독특한 분위기와 내 눈에는 예쁘고 감각적이기만 한 인테리어를 자랑하는 곳인데, 일단 우리의 다른 취향으로 불협 화음이 나올 때면 각자의 취향은 서로가 존중하는 걸로 하고 다음 코스는 곧장 숙소가 있는 성산 일출봉으로 직행이다.


   숙소로 체크인을 해서 한 숨을 돌린 잠깐의 휴식 뒤, 숙소에서 5분도 안 되는 거리에 있는 성산일출봉으로 노을을 보고 저녁을 먹으러 가기로 한다. 원래 평탄한 올레길 정도를 염두에 두고 왔지만, 65세 이상은 입장료가 무료인지라 올해 마침 65세가 되신 엄마가 한번 욕심 내보신다. 생각지 않던 난이도 있는 코스이지만, 엄마가 더 나이가 들면 오르기 힘들 수도 있고, 나 역시 우연히 울릉도에서 10대 비경을 맛보며 벼룩의 유리천장 깨기를 한 번 깨 본 뒤라, 도전해 볼 용기가 생겼다.

   헉헉 거리며 올라간 정상은 예상대로 멋진 풍경을 보여주었다. 한 가지 주의점은 일출봉을 오를 때 절대 뒤를 돌아보아선 안된다. 그 아찔한 높이 때문이다. 자연스레 앞만 보고 직진하게 만들어준 30분 정도의 코스. 일출봉 정상에서의 노을과 야경도 멋졌다.

   정상에서 내려와 배가 고픈 우리는 곧장 근처 식당으로 향하러 막 출발하려는데 갑자기 차에서 "띠띠띠" 경고음이 들린다. 인터넷을 검색해봐도 내가 지금껏 보았던 엔진오일, 바테리 등에 표시 불이 들어온 것은 아니다. 소나타를 처음 몰아봐 익숙하지 않은 터라 갑자기 벌어진 돌발상황에 당황한 나는 '보험을 불러야 하나? 이러다 차라도 멈추면 여행은 완전 끝인데' 하는 온갖 생각들로 머리가 복잡해졌다. 기름 표시등을 내가 잘 못 읽은 걸까? 혹시나 연료가 원인인가 싶어 LPG를 넣으러 주변 주유소로 가려는 찰나, 엄마가 원인이 된 경고 표시등을 찾아 가리킨다. "여기에 불 들어왔네." 안전벨트 표시등이었다. 운전석에 표시되는 내 차와 달리 조수석 쪽 깜빡이 등 아래에 표시되어 불이 들어온지도 몰랐는데, 도둑이 제 발 저리듯 조수석 가까이 들어온 불을 엄마가 먼저 알아챈 것이다. 친구들과 함께의 여행에서는 지도나 운전, 맛집 검색 등 내가 부족한 부분을 친구들이 채워 주기에 나는 80 정도의 에너지만 쓰면 되지만, 엄마와의 여행에선 운전은 물론 검색도 차를 세워 오로지 내가 해야 했고 엄마도 챙겨야 했기에 120의 에너지가 소모되는 듯했다. 하루 종일 힘들어도 내색을 못하다, 놀란 마음에 엄마를 향해 포르테시모의 높은 음자리표가 발산된다.


"엄마!!!!!!!!!!!!!!!"

   놀란 가슴을 한차례 쓸어내리며, 안전벨트는 안전과도 직결되는 부분이기도 해서 오랜만의 여행의 피곤함에 깜박한 엄마에게 한창 잔소리를 늘어놓다 보니 어느새 식당이다. 고기 국숫집에서 방금 전 급격한 포르티시모 연주로 배가 더 고파진 나는 국수를 맛있게 먹어 치웠다. 돔베고기의 부드러움에 한번 놀라고, 국수의 깊은 맛에 두 번 놀란다. 개인적인 입맛으로는 비빔 국수가 입에서 살살 녹던 부드러운 돔베고기와 더 잘 어울렸고, 고기 국수의 진한 국물은 부산 돼지국밥이 생각나게 만들었다.

 


   배도 부르고 불협화음으로 서로 다른 음색의 악기를 맞춰보며 조율하던 첫날은 그런대로 나름 만족스러운 여정이었으나 온몸이 피곤함으로 가득 차 호텔로 돌아와 눕자마자 곯아떨어져 버렸다. 제주도의 경치와 맛있는 음식, 그리고 엄마의 건망증에 놀람의 연속이었던 오늘의 연주는 심쿵의 '놀람' 교향곡이다.


 하이든 놀람교향곡 2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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