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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벤더핑크 Oct 23. 2021

제주도 둘째 날, 운명적 만남 붉은오름

[2악장] 베토벤 교향곡 제5번 '운명'

   항상 새벽 기상을 하는 엄마 덕에 눈떠 보니 마침 아침 6시 즈음이다. 날씨가 흐릴 것 같아 일출은 보지 못할 것 같지만, 숙소가 성산일출봉 코 앞이니 어제 미처 둘러보지 못한 가벼운 무료 올레길을 한번 걸어보자고 츄리닝에 윗 옷만 걸쳐 입고 숙소를 나선다.

   성산봉 일출. 날씨가 흐려 해를 보지 못해도 좋다. 흐린 구름들이 아무리 가려도 장렬히 뿜어내는 강렬한 태양의 붉은빛을 미처 다 가려내지는 못해 그레이 빛 틈 사이로 삐져나온 태양의 붉은빛이 바다의 푸른빛과 만나자 바다는 빛의 조합으로 도자기를 굽듯 라벤더 빛깔을 고요히 빚어낸다.


  울릉도의 5다였던 바람과 돌은 오히려 제주도에 더 적합해 보인다 생각이 들 정도로 오늘 날씨는 바람 일색이다. 흐린 곧 비가 올 것 같은 날씨에 원래 예정이던 우도를 가뿐히 접어두고 오늘은 숙소로 잡은 붉은 노을 휴양림 근처 산 뷰를 감상하기로 한다.


   첫 번째 동선은 산굼부리다. 제주도에 오면 검은색을 표현하는 말이 좀 더 많아져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검붉은 색도 예쁘지만, 숲에서 만나는 이끼가 낀 현무암의 검 초록빛의 조화도 신비롭다. 

비록 안개가 자욱해 오름을 볼 수는 없었지만, 안개 낀 산굼부리는 갈대와 어우려져 나름 운치가 있었다.


    점심을 먹기 위해 고민하던 중 제주도 고사리 향기가 그렇게 좋더라라는 엄마의 말을 듣고 급 선택한 메뉴, 고사리 육개장. 이번 여행에서 나의 최애 메뉴가 되었다. 울릉도에서 진한 나물의 향기에 한차례 취해보았던 나는 고사리 풍미가 진하게 울려 퍼지는 이 고사리 해장국의 뜨끈한 국물이 너무 좋았다. 술을 마시고 먹어도 해장국의 고사리 향기가 한번 더 취해 버릴 것 같았던 고사리 해장국!


    더 로맨틱 카페는 문이 닫혀 있어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유럽 감성의 파란 외관이 예뻤다. 근처에는 메밀꽃이 한창이다.

   그리고 찾아간 '신성한 곳'을 뜻한다는 이름도 예쁜 사려니 숲길. 휠체어를 타고도 숲길을 걸을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점이 인상 깊다. 빼곡한 나무 숲길을 편하게 걸으니 좋았지만, 유명세만큼이나 붐비는 사람 때문에 마스크를 줄곧 쓰고 있다 보니 마음 놓고 맑은 공기를 마시지 못해 아쉬웠다.

    카페가 문이 닫겨 중간 휴식을 못하기도 했고, 내리는 비 때문에 춥기도 하고 사람들도 붐벼, 우린 곧 붉은오름 휴양림으로 향했다. 숙소는 미리 보일러로 바닥을 뜨끈하게 해 두셔서 오자마자 바닥에 누우니, 비로 한기가 들려던 차에 몸이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꿀맛 같은 휴식 뒤 우린 붉은오름 산책 길을 한번 걷고 저녁 식사를 하러 가기로 한다.


툭, 툭


   우산을 노크하는 빗소리를 운치 있게 즐기며 사람들이 거의 없는 숲길을 마스크를 벗고 엄마와 둘이서 오롯이 걸어본다. 산 습기를 머금은 검 초록빛은 생기를 머금고 더욱 짙어진다. 내리는 비에 반짝거리는 잎은 마치 생명력을 다시 되찾고 있는 듯하다. 나도 피톤치드를 만끽하며 걷고 있자니 그동안 죽었던 세포들이 되살아나는 느낌이다.

     사고 후 빨리 걷기 힘들어 아직 안단테(Andante, 느린 걸음의 속도로)인 나의 걸음걸이 속도에 비한다면 모데라토(Moderato, 보통의 빠르기로)의 걸음걸이인 엄마는 이미 저만큼 앞서 걷고 계신다. 숲길을 따라 종류별 나무마다 이름표를 붙여 두었는데, "비목"이란 나무의 이름표를 지나자 엄마가 낮은 톤으로 노래를 흥얼거리신다 갑자기 웬 노래냐 물으니, 비목을 보니 '비목'이란 노래가 생각 나서라 얘기하며 계속 흥얼거리신다. 비옷을 입고 먼발치에서 앞서 가는 행색에, 점차 어두워지는 주변 숲길과 어디선가 들려오는 낮은 노랫소리까지 오버랩되자, 갑자기 영화 곡성이 떠올라 머리가 쭈삣 서는 느낌이라 순간 말리고 싶었으나, 차마 오랜만에 찾아온 엄마의 흥을 깨뜨릴 수는 없었다.

   산책 후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한 저녁은 흑돼지 두루치기와 고등어구이, 손두부가 맛있었던 잘 차려진 가정식 같았던 음식점. 특별히 제주도 특색 음식은 아니었지만, 다양하게 배불리 먹을 수 있었고, 여기저기 보이는 글귀가 인상적이었던 곳.

나도 입과 마음을 좀 다스려야 겠다.




     붉은오름 휴양림을 숙소로 정한 것은 정말 신의 한 수였다. 이번 주에 가기에는 준비가 안되어 있고 빠듯한 일정에 다음 주에 비해 예약을 미리 하지 않아 모든 게 다소 가격이 비쌌지만, 다음 주는 날씨가 싸늘해 질지도 모르고 복직에 너무 가까운 일정이라 다녀온 후 충분한 휴식이 힘들수 있어 언제 갈지 고민 중이었다. 고민하던 찰나, 물리치료 선생님의 첫 번째 추천지 샤오니 숲길과도 가깝고 엄마의 휴양 여행으로 항상 생각했던 맑은 공기의 휴양림이 마침 딱 이 날 하루 자리가 비어있었다. 그래서 결정 장애였던 내가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이번 주로 선택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휴양림에서의 1박 2일, 이틀 내내 비가 와서 안개 자욱한 운치 있는 산책길을 사람들이 많은 번잡스러움과 무더운 햇볕을 피해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아마 비가 오지 않았더라면 숲길보다 더 화려한 바다와 꽃에 발길이 쏠려 엄마에게 필요한 피톤치드의 맑은 공기를 충분히 마쉬지 못했을지도...또, 이 날 비가 아니라 다른 바다를 보러 간 날 비가 왔더라면 모든 일정이 망가져 버렸을 수도 있다. 다행히 비가 오는 날 만난 숲길과 오름은 숲의 고유의 빛깔을 더 짙게 만들고, 뽀얀 안개빛이 더해져 맑은 날보다 더 운치가 있었다. 또, 일정 중 침대가 아닌 유일하게 뜨끈한 바닥이었던 휴양림은 비가 와서 쌀랑해진 날씨에 여행의 노곤함과 차가운 몸을 녹이기에 안성 맞춤이었다.


그리하여, 날씨와 환상의 콜라보를 이루며 이번 여행의 운명과도 같은 만남이었던,

둘쨋날 숙소, 붉은오름 휴양림!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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