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벤더핑크 Nov 29. 2021

등불에 꽃이 피다

먹물 끝에 피어난 꽃

조카들을 데리고 등불 만들기 체험에 나섰다.


   바쁘게 앞 뒤 테이블을 오가며 조카 둘과 내 한지까지 세 명분의 폭풍 가위질을 끝내고 조카들의 먹지와 먹물 그리기 릴레이 바통을 선생님께 토스된 후에야 비로소 내 작품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쉽게 따라 하도록 먹지와 샘플 그림이 주어졌지만, 찍어내듯 똑같이 누군가를 따라 하는 것보다 주로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는 주의다.

조카들 작품, 개인적으로는 먹지를 따라그려 매끈한 그림보다는 자유롭게 그린 오른쪽 허기워기 그림이 제일 마음에 든다.

    찰나의 글귀와 이미지 검색을 끝난 뒤, 밑그림을 그릴 연필도, 따라 베껴낼 먹지도 없이, 그저 검게 스며든 먹물을 금방이라도 뿜어낼 듯 한껏 머금은 붓을 집어 들고 새하얀 한지에 머릿속으로 구상한 그림을 한 획씩 천천히 그어나간다.

   그렇게  순간 내 마음이 그림으로 박제되었다. 그래서인지 등불에 전등을 밝히자, 내 마음도 덩달아 함께 밝아지는 듯했다. 집에서 나의 시선이 잘 머무는 티브이 옆에 놓아두니 어지럽게 휘몰아치는 듯한  내 머릿속과 새까맣게 타들어 가는 듯한  마음속에서 흩날리는 어둠 뒤 숨겨진 곱고 밝은 빛깔이  잠잠해진 폭풍우 뒤 가만히 고개를 드러내듯, 나의 눈길이 그리고 시선이 머물 때마다 내 머릿속에서 점차 어둠이 고요히 가라앉으며  뒤로 감춰둔 흐릿한 실루엣이 점점 선명하게 밝아온다. 요즘 여러 가지 일들로 머리가 아파 머릿속이 마냥 암흑일 줄 알았는데 내 머릿속 한편에는 지난 휴직 기간 실컷 봐온 예쁜 꽃들과 나비가 아직 날아다니고 있었음을 그림으로 꺼내 박제시켜놓고서야 그 존재를 알 수 있었다. 그림을 보다 보면 머리 아픈 일은 희미해지고 나의 기억 한편의 좋은 추억이 점점 더 크게 자라나는 느낌이라 어떨 때는 그림 멍을 때리며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기도 한다. 마치 내 마음에서 오직 좋은 단편만을 가만히 꺼내놓고 들여다보는 기분이랄까. 이래서 그림을 그리며 힐링을 하나보다. 

등불에 전등을 켰을 때 모습

   그러다 어느 순간 매직아이처럼 그림에서 갈까 말까 게임(gostop)홍단과 청단의 실루엣이 튀어나와 나도 모르게 흠칫 놀란다. 무의식 중의 내 기억 한 편에 회사 또래 멤버들과의 또 다른 좋은 추억이 자리 잡고 있었나 보다. 복직 기념으로 오랜만에 반가운 멤버들과 따뜻한 구들목이 있어 시린 이 계절에  딱인 오리집에서 하우스라도 한 판 열어야겠다.

   다정한 말에는 꽃이 피고, 새롭게 핀 꽃에는 나비가 날아든다. 주변을 둘러보면 모두 나비처럼 내 곁에 날아든 인연.


   우린 모두가 등불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등불이 되어 길을 밝혀 주는 인연. 그렇게 바라보면 미운 인연도 싫은 인연도 결코 없다. 내가 만나는 누군가는 그저 나의 길을 보다 환하게 밝혀 주기 위해 나에게로 온 소중한 인연들이다. 


   그리하여, 오늘도 주변 사람들을 나의 등불로 대할 수 있는 다정한 한마디를 건넬 여유를 머금은 하루가 되길.

매거진의 이전글 들숨과 날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