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시간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아온 글귀에 담긴 메시지는 시간이 지나도 바래지 않는 듯하다. 아니 오히려 더 깊은 맛을 우려내는 듯하다. 요즈음은 오히려 빠른 포기, 물러섬, 멈춤이 더 화두가 되는 시대이기도 하지만, 이 오래된 글귀를 읊조리고 있노라면 긴 실패로 포기하려던 사람의 발걸음도 다시 한번 붙잡는 문구가 아닐까 한다. 시작하기 전에는 높아만 보였던 봉우리가 막상 올라서면 아래에서 보았던 것만큼 포기할만한 힘듬이 아니었음을, 그리고 그 힘듬이 인내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임은 올라가 봐야 비로소 알 수 있음을 몇 번 경험해본 지금 이 글귀가 더 가슴에 와닿는 듯하다.
지금은 교환학생이나 어학연수가 필수코스가 돼버린 시절이지만, 당시 2000년도 초반만 하더라도 해외를 나가본 학생이 지금처럼 흔하지만은 않던 시절이었기에 국내선 비행기조차 타보지 못한 내게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게다가 집안 형편도 넉넉한 편이 아니라서 생활비도 걱정이었다. 교환학생이라면 사람들이 학교에서 모든 지원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학교마다 다르긴 하겠지만 생활비, 비행기 티켓 모두 내가 마련해야 했다. 다만 한국 학비를 내면 캐나다 학비로 대체된다. 사실 캐나다의 학비가 한국의 4~5배쯤 되고, 캐나다에서도 랭킹에 드는 좋은 학교라 까다로운 입학전형을 거치지 않고도 좋은 교수진과 학부의 커리큘럼을 들을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진 것만으로도 쉽게 얻을 수 없는 좋은 기회였던 것이다.
결심은 했다. 그렇지만 넘어야 할 산이 한두 개가 아니다.
미국은 여러 명의 교환학생을 선발하지만 캐나다의 경우 단 한 명의 학생을 선발했다. 당시 내 학점은 4점대로 나쁘지 않았다. 학부에서 2등을 해본 적도 있고, 비교적 좋은 평점을 유지하고 있어 승산이 있겠지 하고 있었는데, 웬걸 교환학생 선발 시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직 영어 성적만이 유일한 선발 기준이었던 것이다. 난 대학생이라면 필수 조건인 그 흔하디 흔한 토익조차 쳐본 적 없었고, 고등학교 때까지만 하더라도 영어는 내게 그리 자신 있는 과목이 아니었다.
뿐 만 아니었다. 집에 운을 띄워봤는데, 예상대로 노발대발하셨다. 통금을 9시로 해야 된다고 말씀하시며 자식들을 품 안에만 품고 계시려는 부모님의 보수적인 분위기 속에서, 태어나 고향을 벗어나 본 적조차 없던 나였다. 게다가 당시 IMF를 겪으며 아버지 회사 부도로 집안 형편이 넉넉지 않았다. 국립대라 비교적 부담 없는 학비에도 4년 내내 장학금을 받고 알바로 핸드폰이며 용돈을 마련하며 집에 손을 벌리지 않았던 나였지만, 그렇다고 부모님 허락 없이 무작정 외국으로 갈 순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 저지르고 봐야겠다.
때마침 친구들도 다들 하나둘씩 휴학하기 시작했고, 학교에 나가는 게 가뜩이나 불편했던 나는 일단 휴학계부터 냈다. 그리고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정말 잠자는 시간 빼곤 계속 쉴틈 없이 공부했다. 절대평가가 아니라 어찌 보면 절대적인 상대평가였다. 내가 아무리 높은 점수를 받더라도 나보다 높은 영어점수를 가진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나는 떨어지는 게임이었다. 그해 어떤 점수를 가진 어느 누가 지원할지 모르니 합격도 하늘이 정해 주시는 운에 따라야 했던 것이다. 절박했던 나는 운도 실력으로 만들어야 했다. 눈 떠있는 시간은 모두 영어에 노출시켰다. 밥 먹을 때도 입으론 밥을 씹고 눈으로 영어 단어를 훑으며 공부했다. 잘 때에는 머리맡 영어 테이프를 자장가 삼아 잠들었다. 수능을 이렇게 공부했다면 난 서울대도 들어갔으리.
하지만 한편으로 외국어 공부의 진정한 매력을 그때 알게 되었다.
교환학생이나 어학연수를 준비 중이라면, 혹시 참고할 만한 당시 영어를 배울 때 가지고자 노력한 마음가짐 몇 가지를 얘기해 보고자 한다.
1. 영어를 목표로 삼지 않는다.
고등학교 때에는 선택권이란 없는 강제로 주어진 하나의 암기 과목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이 손에 든 K1 소총처럼 입에 영어의 실탄을 장전하고 외국인만 보이면 당장이라도 알파벳 총알을 쏘아댈 기세로 실전을 앞두고 있던 나에게 이제 영어는 학문이라기보다 어찌 보면 하나의 생존 도구에 가까웠다. 수능 점수를 올리기 위해 마구잡이로 닥치는 대로 단어를 암기했던 고3 때 보다 단연코 절박함의 차원이 달랐다. 혈혈단신 외딴섬에 떨어져 밥이라도 굶지 않으려면 일단 말이 통해야 했다.
또한, 나는 단순히 언어를 배우는 것은 한국에서도 충분히 좋은 학원과 커리큘럼이 있어 가능하다란 생각에 굳이 바다를 건너 캐나다를 가면서 영어 그 자체를 목표로 삼지 않았다. 나의 목표는 우리나라보다 먼저 진통과 성장을 겪은 나라에서의 앞선 문화와 그들의 생각을 배우고 싶었고, 영어는 그러기 위해 그 자체로서 학문이라기보다는 학문을 배우기 위해 필요한 하나의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사람의 심리가 묘한 것이 일단 학문이라 느끼지 않으니 어느 순간 예전처럼 영어가 마냥 딱딱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현재 진행형, 과거 분사와 같은 문법을 외워야 하는 과목이라면 머리부터 지끈거려오지만, 옆에 블랙핑크나 BTS가 앉아 있고 오직 영어로만 말을 걸 수 있다면, 누가 시키지 않더라도 바디랭귀지나 번역기를 돌려서라도 대화를 이어가고 싶은 욕구가 저절로 생기는 것처럼 말이다.
2. 시작은 음운학부터
그리고, 나는 문법 준비하던 남들과 다르게 영어 공부의 시작을 음운학 공부로 시작했다. 사실 경상도 사투리라도 비슷하게 들리지만 다 같은 게 아니다. 서울 사람 귀에는 똑같이 들리겠지만 토박이 귀에 들리기에는 부산, 울산, 진주, 거제 등등 사투리마다 아주 미묘한 차이가 있다. 나의 전공은 경영학이라 수업 시 발표가 많은 편이었는데, 발표자들이 타도시 사람이라도 되는 날이면 그날에는 발표 내용보단 그 미묘한 억양에 집중하게 되어 아무리 내용이 좋아도 귀에 온전히 들어오지 않았다. 모국어조차 이런 미묘한 차이가 귀를 붙잡는데 하물며 다른 언어를 쓰는 이방인인의 억양은 오죽하겠냐는 생각에 이질감을 최소화시키자는 생각으로 영어 발음부터 공부했다. 예를 들면, 영어 알파벳 Apple은 한글로 '애플'이라 읽지만 입 모양, 혀 위치, 입술 모양 사실상 한글의 발음과는 전혀 다르다. 나는 영어에 한글 발음을 대입하지 않고 온전히 A, B, C, D 영어 알파벳의 발음부터 처음부터 다시 배우기 시작했다. 발음을 교정하면서 머리에 기억된 발음이 교정되다 보니 자연스레 영어 듣기도 향상되었다.
옛말은 정말 틀린 게 없는 것 같다.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들린다.
3. 영어라는 프레임 심기
이뿐만 아니다. 1개 국어 시절에 눈 뜨지 못했던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처럼 언어가 사고를 지배하는 것인가 아니면 사고가 언어에 반영된 것인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실제로 색깔이나 방향에 대한 언어가 더 구체적이고 세분화된 민족은 언어나 방향을 구분하는 능력이 더 뛰어나고 한다. 어느 쪽이 먼저인지 혹은 서로가 쌍방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인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언어와 사고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나의 경험을 일례로 본다면, 영어를 배우면서 나의 사고가 변화된 경험은 분명히 있었다.
한글은 주어+ 목적어 + 동사 순이지만, 영어는 주어 + 동사 + 목적어 순이다. 서양 문화를 익힌 영향일 수도 있겠지만, 영어로 이야기할 때, 나는 훨씬 더 능동적이고 적극적이 된다. 한국어는 끝까지 들어봐야 알지만 영어는 메인이 되는 동사가 먼저 치고 나와 좀 더 직접적이고 저돌적이다. 그리고 영어에는 높임말이 없어 나이 적고 많음에 상관없이 언어 앞에 모두가 평등하다. 여덟 살짜리 외국 어린아이와 대화를 하다 보면 그 아이가 전혀 어리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실제 영어의 능력은 그 아이가 훨씬 더 뛰어나다 영어 공부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난 겨우 두 ~ 세 살 정도의 언어능력을 가졌을 뿐이다.) 이에 어린아이와 노인도 나이를 넘어 동등한 친구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언어를 배우다 보면 자연스레 그 문화권의 사람들의 생각과 관점도 습득하게 된다.
어느덧 영어란 언어의 새로운 프레임을 배우면서, 어느새 나도 모르게 기존의 나에겐 없던 적극적이고 수평적인 틀을 내 안에 짜 놓고 있었던 것이다.
후에 잠시 배운 프랑스어를 참고로 예로 들자면, 프랑스어는 훨씬 복잡, 정교하고 섬세하다. 주어도 6가지, 동사도 주어에 따라 모두 변하고 시제도 영어보다 더 세분화되어 있을 뿐 아니라 명사에 남, 녀 성별을 구분해 놓아 외국인이 배우기 정말 어렵다. 프랑스어 선생님이 본인이 프랑스인인걸 다행으로 생각한다고 할 정도로 암기할 양이 많은 언어로 영어가 일 년 만에 어느 정도 수준의 언어구사가 가능했다면 프랑스는 2~3년은 걸리도 힘에 부칠 것 같은 느낌이다. 영어권이 좀 더 실용적인 느낌이라면, 유럽은 르네상스를 비롯 각종 혁명 등의 여러 문화의 혼재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좀 더 섬세한 언어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언어를 배우다 보면 언어에 사용하는 사람들의 품격, 특성, 습성이 뭍어나 있는 것 같아, 외국어를 배우다 보면 어느새 나도 봉숭아 잎에 손톱이 물들듯 조금씩 그 고유한 성격의 빛깔에 물들어 가는 것 같다.
이렇듯 언어를 배우면서 단순히 문자만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그 민족의 문화, 역사, 사고까지 오랜 시간 응축된 어떤 큰 집합체의 덩어리가 함께 따라오는 듯한 오묘한 매력을 느낀다.
그리하여 9개월이라는 기나긴 시간 끝에 마침내 나는 토플 점수 247점(300점 만점)을 획득했다. 지금이야 토익 만점도 많은 시절이라 별 거 아닌 점수이겠지만 당시 상담차 들린 당시 유학원에서는, 서울에서나 있을 법한 점수대이고 부산에는 이 점수를 가진 사람은 몇 명 안될 거란 얘기도 들었다. 국제협력센터에 교환학생 신청서를 냈을 때에도 담당자분이 교환학생 신청 접수하면서 굳이 이 정도로 높은 영어 점수까지는 필요 없는데 라는 의아하다는 반응이셨다.
그렇지만 나는 이때, 토플 점수로 비단 교환학생이 되기 위한 대학 수업을 듣기 위한 언어 자격요건만을 획득한 것은 아니었다. 공부할 당시에는 느끼지 못했지만, 내가 습득한 것은 결코 언어 하나만은 아니었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강요가 아니라 내가 하고 싶어 선택한 공부, 그 공부의 끝자락에서 눈 떠 보니 그간 접해보지 못했던 무엇인가가 어느 순간 성큼 내 옆에 다가와 자연스레 자리매김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산 정상을 정복했을 때 내가 '정상 정복'이란 목표를 이룬 것에 대한 보람만큼이나, 두 뺨을 스치며 흐르는 땀을 식혀줄 시원한 바람, 비타민보다 더 진하게 그간 고생을 잊게 만드는 탁 트인 풍경과 풀잎 향을 한 움큼 머금은 상쾌한 공기가 어쩌면 가슴속 깊숙이 더 파고드는 것처럼~